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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유 May 06. 2019

어쩌다 사장, 피터 드러커를 만나다.

사업가가 아닌 경영자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다.



첫 출근, 2015년 7월 1일


 2015년 6월 24일 회사를 사직하고 경남 거제에서 부산 해운대로 이사를 했다. 3년여 동안 나와 딸아이를 내조하는 것에 충실했던 아내도 가업의 기업화라는 대의를 위해 딸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유치원을 찾아 나섰다. 집과 공장 출퇴근 거리가 도보로 15초였다면, 유치원과 공장의 통원 거리는 차로 3분 거리였다. 무엇이든 다 가까이에 밀집한 것은 세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한 조치였다. 언제든지 집, 언제든지 회사, 언제든지 유치원에 뛰어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그때서야 가장은 바깥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동안 눈으로만 보고 곁에서 슬쩍슬쩍 도와주기만 했던 가족의 일을 가까이에서 직접 들여다보며 당장 도움이 필요한 부분들에 집중하며 업무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한 사람만 일하던 체제에서 두 사람이 일하는 체제로의 변화를 위한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고 정식 출근을 했다. 그때가 2015년 7월 1일이었다.

'매장 한켠에 마련한 우리 두 사람의 사무 공간'


 당시 무엇을 해야 하고, 브랜드를 어떻게 경영해야겠다는 고민도 없이 당장 실무부터 어떻게 쳐내야 할지만 고민하고 눈 앞에 펼쳐진 업무들부터 사무, 생산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쇼핑몰 내 게시글 관리부터 전화 상담, 송장 관리, HTML 공부, 포토샵 공부, 키워드 광고, 쇼핑몰 관리, 이벤트 기획, 상품 내포장, 택배 포장, 재고 관리, 생산 관리, 위생 관리 등 사무실 뒤켠의 자사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귀한 먹거리들을 귀하게 풀어내기 위해 아침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주말도 없이 몇 개월을 그렇게 보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나와 아내는 우리 브랜드의 슈퍼맨, 원더우먼이어야만 했고, 한 자루에 40kg가 넘어가는 콩 자루가 들어오는 날이면 둘이서 '하나, 둘, 셋, 으쌰~!' 하면서 들어 날라야 했다. 물론 출퇴근 시간은 15초면 충분했고, 딸아이의 등원, 하원도 순조로웠다.



귀인이 나타나기 시작하다.


  우리 부부가 경남 거제에서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들어와 두 사람을 포함해 이제 갓 직원 3~4명 남짓한 작은 소미노에 인생을 걸자 양가 가족 주변의 지인께서 이런 우리 부부의 용기 있는 도전과 열정을 지지하고 도와주려고 하는 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중에 한 분이 바로 경영의 ‘ㄱ’도 모르고 경영 일선에 뛰어들어 가업을 기업화해보려고 발버둥 치는 나에게 피터 드러커 경영 아카데미를 추천해주셨다. 사실 당시 나는 여느 2세, 3세들처럼 MBA를 다닐 금전적,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전공과 경력조차도 식료품 비즈니스에 전혀 관계없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경영과 식품의 배움이 매우 절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배울 여유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이런 실무 중심의 아카데미는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피터 드러커 경영 아카데미 수업이 시작되었고 서울에서 저명한 강사들이 초빙되어 매주 부산으로 내려오셨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절실했던 나는 엄청난 속도로 지식을 습득했고, 기업화를 앞둔 상황에서 회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업의 정의부터 우리 브랜드의 사명, 비전, 목적, 목표, 핵심가치, 고객, 고객의 기대가치, 우리의 기술, 핵심역량 등을 2~3개월에 걸쳐 정말 진지하게 많이 고민하고 많이 물어도 가며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사, 전략, 조직화 등 배운 것 중에 바로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은 바로바로 옮겨 실행하기에 바빴고, 매주 돌아오는 수업이 너무나도 기다려졌다.



단 한 번도 불 끄고 자자던지, 혼자 공부해라고 한 적이 없었다.


 이때를 회상해보면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시작된 수업이 저녁 10시에 끝나면 대부분 강사님들이 숙박을 하고 가셨기 때문에 10시 30분부터 12시까지 생생한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다. 그러고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으면 강사님은 먼저 숙소로 올라가시고 동기들끼리 남아 더 이야기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밤늦게까지 이야기 나누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뒤풀이까지 끝나고 집에 오면 나는 설레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그냥 잠이 들 수가 없어 사무실에 들려 강의노트를 정리했고, 그러고는 집에 새벽 2~3시에 들어가면 자고 있는 집사람을 또 깨웠다. 그러고는 1~2시간 동안 내가 배우고 나눴던 모든 것을 똑같이 집사람에게 전파 교육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마웠던 것은 아내가 단 한 번도 불 끄고 자자던지, 혼자 해라던지, 재미없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항상 졸린 눈 비비고 일어나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줬다.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나의 아내는 웬만한 피터 드러커 책 좀 읽어봤다는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자부한다. 아무튼 당시 나는 초보 경영인이었지만 이 모임에는 크고 작은 조직의 중간관리자들부터 기업 경영인, 방송국 PD, 컨설턴트 그리고 피터 드러커가 경영의 난이도 중에 가장 어렵다고 말한 병원의 경영자들까지 나에게는 모두가 선생님이었고, 내 경영 인생에 가장 혁신적인 학습을 했던 기간이었고, 우리 브랜드를 기업화시키기 이전에 회사의 뼈대를 세우고 뿌리를 내리는 중요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사업가가 아닌 경영자를 선언하다.

그것도 남이 성공한 방식이 아닌 내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주 역학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론적인 관점에서 ‘된다’, ‘안된다’를 떠나 나의 타고난 재능,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참고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내 사주에 따르면 사업가보다는 학자, 교수, 종교인, 컨설턴트 등이 익숙한 직업군이었기 때문에 사실 사업가라는 직업은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많이 없는 직업이었다. 또한 나의 죽마고우가 20살 때부터 하나의 사업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어떤 행보를 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혀를 내두르는 이 친구의 명석함과 판단, 실행력, 교우 능력에 ‘사업은 저런 친구들이 잘하는 거야..’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피터 드러커를 공부하며 나는 작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기업이라는 것이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최소 비용으로 최고의 수익을 내는 것이지, 실제 기업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더 나은 사회, 즉 기능하는 사회를 실현하는 가장 이상적인 조직으로서 올바른 기업가 정신으로 좋은 기업을 만드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라는 피터 드러커의 이야기가 굉장히 큰 내 마음을 많이 움직였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뭐든 한다는 사업가보다는 올바른 경영으로 정말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기능하는 사회를 실현하는 조직을 만드는 경영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수익은 유일한 목적이 되면 안 되는 것일 뿐 기업의 아주 중요한 수단이며, 영리 조직인 기업이 수익을 확보하고 만들어간다는 것은 기본이다.


Efficiency is doing the thing right. 

Effectiveness is doing the right thing. 


 경영자로서 내가 항상 염두하고 있는 피터 드러커의 명문 중 하나이다. 효율성과 효과성의 차이에 기반한 이야기인데, 효율성은 일을 잘하는 것의 문제이고, 효과성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지만 기업의 의사결정에서 순서를 굳이 정하자면 효과성을 먼저 고려한 이후 효율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 경영 관점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에 지속적으로 집중할 때 괄목할만한 큰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과 관리에 대한 끈을 놓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급한 일에만 치중하게 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일에 지속적으로 집중하고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놓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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