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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n 23. 2021

책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2021.04.13


<너무 시끄러운 고독 - 보후밀 흐라발>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는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곰팡이가 군데군데 피어있다.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폐지 압축기 한 대와 술 냄새, 그리고 썩은 것들의 불쾌한 향기가 어우러진 턱수염을 매만지는 노인이 당신의 눈앞에 있다. 당신이 그의 이야기를 궁금해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의 삶에도 어느 정도의 고독이 자리한다는 뜻일 것이다.



  제목에서부터 역설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독자가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 '한탸'의 역설적인 삶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 마치 자서전처럼,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한탸의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의 삶을 이리저리 오간다. 현재의 삶에서 한탸는 압축기의 압축 버튼을 누르기 전, 파기될 위험에 처한 책들을 펼쳐놓고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구절을 마지막으로 음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슴에 간직한 채 뭉개진 종이들을 꾸러미로 만들어 소각장으로 보낸다.      


  그의 곁에서는 예수와 노자의 유령이 각각 '미래로의 전진'과 '기원으로의 후퇴'를 주장하며 토론을 벌인다. 저 먼 하수구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생쥐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한탸는 붉은색과 터키 옥색 치마를 입은 집시 여자 둘이 시원한 지하를 찾아 가끔씩 내려올 때면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한다. 모든 일들은 방랑 생활의 암울함과 비참함을 느끼지 못하는 척 부산을 떨 듯 이루어진다. 밤에도 그는 자신을 짓누를 것처럼 쌓여 있는 2톤의 책과 함께 잠이 든다. 조금씩 조금씩 선반이 책의 무게에 못 이겨 내려앉는 소리만이 고요한 밤중, 한탸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이처럼 폐지와 버려진 책들을 압축하는 일을 하는 그의 삶은 고독하지만, 주위의 것들로 인해 너무나도 시끄럽다.


  그가 들려주는 8장의 삶 속에서 우리는 그가 살아왔던 삶과 그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이해하게 된다. 그의 과거에는 현재와는 조금 다른 ‘진짜’ 소란이 자리했던 것 같다. 그가 젊은 시절을 회상할 때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연인이었던 ‘만차’와 ‘일론카’, 친구와 '그랜드 슬랄롬'(술집 투어)을 했던 일, 그리고 완벽한 목표와 계획이 있고 옷차림에 멋을 내고자 바지에 다림질을 하며, 보라색 양말에 하얀 샌들을 신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한탸는 그렇게 살아가던 시절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관계를 맺기 위해 숱한 노력을 기울여 봤지만,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고독함에 지친 것이 틀림없다. 고독 속에서 나이가 들며 결국 그는 책을 압축하는 일로부터 고독으로의 해방감을 느끼게 되고, 후에 그의 모든 일상을 그것에 바칠 정도로 그 일에 매료되어 버리고 만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는 세상과 벽을 쌓고 마침내 현자들의 이야기에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은탁하며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한탸가 누리는 행복에도 끝이 찾아오게 된다. 압축기가 엄청난 크기의 신식 수압 압축기에 밀려 쓸모가 없어지고, 더 이상 압축할 책을 구하지 못하게 된 한탸는 좌절한다. 그에겐 이제 살아가야 할 이유와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남지 않았다. 그는 기도하며 자신의 압축기 속 책들과 운명을 함께하고자 마음을 먹는다. 나는 그저 평범한 젊은이에 불과했던 그에게 고독이 찾아오게 되면서 그의 운명에 어떠한 바람이 불어왔는지를 실감하며 한순간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한탸가 고독의 종말에 다가서는 최후의 순간에, 책 외에는 아무것도 마음에 두지 않은 것 같았던 그가 몇십 년 전의 기억 속에 존재하던 연인 ‘일론카’의 이름을 떠올렸다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를 느끼며, 나는 그가 살아가던 세계,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그의 고독하고 고뇌에 찬 세계의 끝을 마주하게 되었다.



 


여름밤의 떨리는 미광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고 달의 형태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 나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우정, 영원으로 형성된 고도의 감각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 이마누엘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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