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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의꽃 Nov 05. 2021

엄마, 딸 28년

하루하루가 특별했던 28년 기록의 첫 시작. 

" 아이에게 천왕봉 일출을 선물 해줄거야"

 

 아이 백일을 며칠 앞둔 어느날. 나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 


"그래, 한번쯤은 아이와 지리산 종주하는 것도 멋진 일이지"

 

나중에 아이와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하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던 친구들은 천왕봉 일출이 바로 아이의 백일 선물이라는 나의 말에 기겁을 했다. 


'백일 된 애를 둘러업고 지리산에 오르겠다니. 

게다가 삼대가 선행을 해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이라니' 


친구들은 마치 내가 아이와 동반 자살이라도 하러 가는 것처럼 뜯어말렸다. 하지만 나는 단호했다. 

애 다섯을 업고 남산을 올라도 숨이 남아 돌 정도로 열정과 체력을 자랑하던 20대 청년이었던 나는 겁나는 게 없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천왕봉은커녕 지리산행 버스에도 오르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으니.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팠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자신에게 닥쳐올 불운을 예감하고 목숨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는 친구들의 말을 부정했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나의 무모함에 기가 막혔다.  

하긴, 겨우 29살 백일 된 아이의 엄마가 뭘 알았겠는가?

그런데. 지금, 그때의 내 나이만큼 아이가 자랐는데,  왜 여전히 모르고 있는 건지.  




  처음 아이를 낳고, 참 막막했었다. 남편도 없고,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지지하고 응원해주고 돌봐줄 가족도 없었던 어린 엄마인 내가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겉으로는 '나 아직 젊어!! 잘 할 수 있어' 는 위안과 '엄마는 강해!!' 라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모성의 힘을 믿으며 자신만만한 척했지만, 당장 혼자 산후조리를 해야 되는 현실 앞에서 두렵고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이와 함께 할 우리의 미래는 행복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아이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고 싶었다.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에 가서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지. 라며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다짐했었다. 

그 다짐의 첫 출발이 아이의 백일날 지리산을 등반하는 거였으니.  

'민족의 명산을 오르면서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아픔들과 고통과 편견들을 뛰어 넘자.  

마침내 정산에 올랐을 때의 기쁨과 환희를 맛보는 듯이, 그렇게 어려움을 이겨내는 인생을 살자.' 

는 의미도 부여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시도도 못해보고,  

내가 얼마나 무모하고 무지한 엄마라는 것만 깨닫게 되었다는. 

 

그 첫 시도가 좌절된 것을 시작으로, 아이와 특별한 날에 특별한 시간을 보내겠다는 시도는 번번이 엎어졌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었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었고, 무엇을 좀 해보자 하면 아이는 아팠고, 

어디에 숨어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는지 신기할 정도의 사건 사고가 터졌다. 

행여 모든 조건이 완비되어 소풍이나 여행을 떠나기는 했지만, 어린 딸과 젊은 엄마, 단둘의 여행은 마냥 좋고 행복한 것만 아니었다. 좋았던 것만큼 외롭고 쓸쓸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자랄수록 나의 외모뿐 아니라 성격. 취향. 자질을 그대로 빼어 닮은 아이는 나만큼이나 집을 좋아하는 집순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딜 가자고 하면, '귀찮아. 집에서 무한도전 볼 거야.' 이런 식이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좌절되어가는 것은 추억 만들기뿐만 아니었다. 

특별한 날의 기록을 남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매일도 아니고 적어도 계절이 오고 바뀔때즈음, 생일이나 어린이날 어버이날 크리스마스 부활절 등. 

일년에 몇날은  사진이나 일기를 남기고 싶었다. 

훗날 시간이 지나, 아이가 사진들을 보면서 힘들 때는 위안을, 기쁠 때는 생의 소중함을 배우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만만치 않은 일상이 되어갔다. 

아이는 자라면서 어딜 가는 것만큼이나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고,  

하루가 인생이며,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야 말로 인생의 특별함 이라는 것을 깨닫기엔 나와 아이, 둘다 너무 어렸다.   


 어느순간, 생일, 어린이날. 봄. 여름. 가을. 겨울. 크리스마스 등 우리의 특별한 날의 행사는 그냥 일상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일상이 되었고, 

생일때마다 찍어주던 아이의 프로필 사진은 아이가 강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더 이상 찍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뒤늦게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나는 공부 하고 습작을 하느라 내 인생에 골몰해 있었고, 아이에게 엄마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공모전에 당선이 되고, 대형 기획사에 들어가 유명 작가와 함께 작품을 준비하느라 그나마 가뭄에 콩 나듯 하는 특별한 날의 행사도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일 년에 몇 번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럴싸한 사진은 아니더라도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의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특별한 날의 기록이니 추억 만들기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처럼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아이와 함께 했던 28년, 하루하루가 특별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백일 된 아이를 들쳐업고 지리산행 시외버스를 기다렸던 무더웠던 여름의 어느 날도.

 처음으로 사진관에서 돌 사진을 찍었던 그날도. 

아이에게  겨울바다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해서 동해로 갔다가 차멀미해서 죽을 뻔했던 그 겨울의 어느 날도. 

놀이동산에 갔다가 돈이 없어 놀이 기구는 못 타고 핫도그만 먹고 왔던 그 가을의 어느 날도. 

사진사가 남자아이인 줄 알고 남자 옷을 입히고 프로필 사진 찍었던 그 봄의 어느 날도. 

(더 심각했던 건, 엄마인 나는 그게 남자 옷인 줄도 몰랐던 거.)

나의 실수로 뜨거운 물에 데인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던 자책감으로 얼룩졌던 그  어느날도.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하루하루, 그 모든 어느날도 나에게는 모두가 특별했다.  

 비록 턱 밑까지 숨이 헉헉 차올라와 죽을 것 같았던 날들이 더 많았지만, 

지나고 보니, 모두 우리의 28년, 시간. 우리의 인생이 되어주었다.  

 아이와 28년을 살면서 행복한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행복한 날 보다 아프고 힘들었던 날이 더 많았다. 

아이가 사랑스럽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었던 갈등도 있었고, 두 번 다시 얼굴 보고 싶지 않은 미움도 있었으며, 

내가 왜 저 애의 엄마가 되었을까. 라는 자책은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언제나 우리는 보란 듯이 화해하고, 용서했고, 서로를 인정하면서 체념하고 길들여져 갔다. 

그렇게 가족으로 28년을 살았다. 


인생의 특별한 날은, 오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지는 한참이 되었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일상이 우리의 생을 반짝이게 한다는 것을. 

이제 더 늦기 전에 그 반짝이는 것을 붙잡아 기록을 해보는 게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딸로 살았던 우리의 지난날을 기념하면서, 

언젠가 나의 곁을 떠날 아이에게 너와 함께 했던 지난날은 하루하루가 특별했음을 고백하는 연서와 같은 기록을 남겨봐야지.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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