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만사가 귀찮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날.
그런 날이 이어지고 있다.
언제인가? 아~ 힘들어. 한국 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니 그 후 모든 것이 갑갑해지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날씨는 왜 이렇게 더운지. (아프리카니까)
먼지는 왜 이렇게 많은지. (천지사방이 흙길이니까)
약속들은 왜 안 지키는 건지. (한 두 번도 아니고.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야?)
[사실. 이곳에서 약속은 무의미하다.
특히 아이들과의 약속은 더 그런데, 일단 아이들에게는 약속시간을 알려줄 시계와 핸드폰이 없을뿐더러
약속을 지킬 수 없는 백만 가지의 이유들이 갑작스럽게 생긴다.
약속 따위하지 않고 있을 때 잘해주는 게 최선인데 매번 나는 아이들에게 다음을 약속한다.]
평소 때는 당연한 것들이 짜증이 된다.
뒤늦게 갱년기 증상인가?
만약 그렇다면 무작정 이 증상을 놔두고 봐야 하는가?
그러던 차에 글로리가 피망을 팔려왔다.
그저 줘도 누가 갖고 가지 않을 정도로 상품 가치가 아예 없어 보이는 피망이 3개에 200실링이라고 한다.
얼마나 팔았을까? 보아하니 하나도 팔지 못해서 나에게 온 것 같다.
얼마나 걸었는지 아이의 온몸은 먼지투성이에다 땀범벅이다.
‘제발 사주세요.’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글로리와 더럽고 부서진 대야 안에 시들어 쪼그라든 피망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났다.
슬퍼하기 싫어서 짜증이라도 내야 될 것처럼 말이다.
글로리에게 "왜 학교에 안 갔냐"라고 물었더니 글로리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학교 급식값이 없어서 못 갔을 것이라 짐작을 한 나는 얼마 전에 선교사님이 염소도 사주고 나는 장학금도 줬는데 왜 급식 값이 없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해하기가 싫었다.
내가 그렇게 공부만큼은 포기하지 말라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했건만.
나는 글로리에게 그만 짜증을 내고 말았다.
사실은 아이의 학교를 보내지 않는 마마 글로리에게 더 화가 났다.
왜 학교에 안 갔냐니까!!
글로리는 겨우 대답을 했다. 마마가 아프다고
60이 넘은 마마 글로리는 자주 아프다.
어느 날은 머리가. 어느 날은 가슴이. 어느 날은 어깨가 또 어느 날은 온몸이.
틈만 나면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나를 붙잡고 자신의 머리와 어깨와 가슴을 만지면서 고통을 호소하면서 약을 달라고 한다.
의사나 약사가 아닌 나는 함부로 약을 줄 수가 없어 비타민을 줄 때가 많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괜찮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갱년기일 것이라고 확신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열이 나고 많이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마마 대신 글로리가 빨래도 하고 피망도 팔러 다니고 엄마를 돌봐야 해서 학교에 갈 수 없었다고.
사정도 모르고 짜증을 낸 것 같아 미안해진 나는 피망을 이천 원 어지를 사고 천 원을 용돈으로 주고 비스킷과 소다와 혹시나 마마가 말라리아일지도 모르니 말라리아약과 마마 글로리의 만병통치약 비타민을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사주고 싶었고 용돈도 넉넉히 주고 싶었다.
툭하면 아픈 60이 넘은 홀 엄마와 사는 16살 소녀가 짊어진 짐을 덜어주고 싶지만, 이 역시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에 짜증이 난다.
한 달에 10만 실링.
한국 돈으로 6~7만 원만 있으면 이 두 모녀는 돈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다.
글로리도 마음 놓고 학교에 다닐 수 있으며 피망을 팔려 다니지 않아도 된다.
나에게는 글로리 모녀가 걱정 없이 먹고살 만한 돈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
닭이나 염소를 사줘서 키우게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식으로 마마 글로리가 열심히 일해서 아이를 양육할 기회를 주는 것이 더 낫다.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기에 인내가 필요하기에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힘이 들 때가 있다.
무엇보다 동네에는 글로리라 모녀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그들에게만 특혜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상황들이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짜증이 난다.
겨우 천 원과 비스킷과 소다와 비타민이 최선일 수밖에 없는 나의 인색한 호의에도 짜증이 났다.
그러면서 짜증만 나는 갱년기를 지나고 있는 나에게도 짜증이 났다.
이래서 갱년기가 사춘기를 이기는구나 싶었다.
며칠이 지난 주일.
글로리는 피망을 판 수입과 내가 준 천 원에 대한 십일조를 했다.
마마 글로리는 쌀 한 홉과 아보카도를 감사의 헌물로 들고 왔다.
그리고 지난 한 주간 자신의 일상이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았는지 이야기한다.
짜증이 그득 배어 있었던 나의 호의가 글로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십일조를 할 수 있었고, 노트를 살 수 있었다고.
마마 글로리는 내가 준 약을 먹고 다 나았다고 거듭거듭 감사하다고 했다.
모든 게 감사할 것밖에 없다고 고백할 뿐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두 랩돈과도 같은 전 재산을 기꺼이 내어놓은 것이다.
가난한 자의 복을 누리고 있는 글로리 모녀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받았다.
그녀들을 도울 수 있다고 자만했던 나는 부끄러웠다.
감사하고 있지 않는 일상이 곧 짜증이 되었다.
매일같이 기록한 감사일기를 쓰지 않은 지 한참이 지났다.
짜증에 집중하느라 감사를 놓쳤다.
그러면서 새삼 깨닫는다.
감사와 가진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가진 것이 많아서 감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감사는 가진 것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가지지 않는 것에서 쪼개는 것임을.
이곳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통해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지금 나의 이 증상은 감사의 결핍 때문이라는 것을.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눅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