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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삶들의 투닥거림, 주토피아2

관계가 깊어지며 마주할 수밖에 없는 갈등

by 따스한 골방

※스포일러로 느껴질 수 있는 글입니다. 원하지 않는 분은 다음에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주변에서 주토피아2를 추천하여 오랜만에 영화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전작인 주토피아를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었고, 주토피아의 OST인 <Try everything>를 좋아해서 종종 듣기도 했었다.


<주토피아>를 냈던 디즈니나, <Up>의 픽사에서 내는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좋아한다. 아이들과 어른들을 가리지 않고서 많은 사람들을 영화 속 세계로 초대한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생각할 거리들을 만들어준다.


순수했던 동심을 자극하면서 가슴이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동시에, 현실적인 어른의 입장에서 본인의 삶을 한번 돌아볼 수 있도록 돕는다. <주토피아2>도 그랬다.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나는 그 중에서도 '주디'와 '닉'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생기는 갈등 요소들에 집중하며 영화를 감상했다.


《주토피아 2》(Zootopia 2) 공식 포스터 © Disney.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를 위해서 노력하는 토끼 주디. 그리고 유유자적하며 개인주의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닉. 전작인 <주토피아>에서도 이 둘은 참 다른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서로의 아쉬운 부분들을 채워줄 수 있었다. 이상과 진실성이 필요할때는 주디의 접근법이, 현실과 요령이 필요할때는 닉의 접근법이 필요했다.


어느 한 쪽이 없었다면 <주토피아>에서 나쁜 악당들을 때려잡지 못했을 것이다. 주디만 있었다면 정면승부만 고집하다가 악당들이 놓아둔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고 전작은 베드엔딩을 맞이했을 것이다.


반대로 닉만 있었다면 애초에 <주토피아>은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Zoo(동물원)과 Eutopia(이상향)이 합쳐진 말이 Zootopia니까, 동물들의 이상향인 주토피아에서는 이상을 꿈꾸는 토끼인 주디가 반드시 필요하다.


주토피아의 작가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캐릭터의 서사적 밸런스가 너무나도 잘 짜여졌다. <주토피아>에서 주디와 닉은 서로의 차이를 온전히 수용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경찰로서 활동하는 순간만큼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꿔줄 수 있는 최고의 파트너들이였다. 그렇기에 사회의 거물인 악덕 시장을 잡아넣음으로써 아이들에게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제대로 던져줄 수 있었으며, 주토피아라는 말에 걸맞는 이상적인 결말로 전작을 마무리지을 수 있기도 했다.




기존의 <주토피아>에서 주디와 닉의 관계는 이처럼 직장에서의 파트너 관계에 가까웠고, 그 정도면 서로 맡은 업무를 처리하는데 크게 지장이 없었다. 때로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실랑이를 할 수도 있겠으나 이만하면 충분히 괜찮은 콤비였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주토피아2>에서의 둘의 관계는 보다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작에서도 약간의 낌새가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주디와 닉이 대놓고 사랑 싸움을 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일적인 파트너가 아니다. 때로는 썸타는 사이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투닥거리곤한다.


사회적 관계에 머물렀던 시기에는 서로에게 매력으로 보였던 성격적 차이가 이제는 결점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는 '서로가 다른 것'으로 여길 수 있었던 부분들이, 서로 사랑을 느끼고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가면서 '서로가 틀린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애착을 추구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진실되고 깊은 사랑이 필요하다. 여기서 문제는 사랑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갈등'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점이다. 안정적인 사랑을 위해서는 깊은 관계가 필요하지만, 관계가 깊어지는 과정에서 사랑은 불안정해진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사랑과 우정을 가리지 않고서, '깊어지는 관계들' 모두에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주디는 분명 닉을 좋아하고, 때로는 호감을 넘어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닉도 마찬가지다. 둘은 '서로의 관계가 깊어지면 좋겠다'라는 공통의 목표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다투고, 결국 둘의 관계를 상징하는 '홍당무 녹음기'는 절벽에서 떨어지며 부서지게 된다.


이 장면도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절벽의 끝자락에서 홍당무 녹음기가 떨어지려고 할때, 둘은 소중한 상징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모두 손을 뻗었다. 차라리 주디나 닉 중 한 쪽만 손을 뻗었더라면 어쩌면 홍당무 녹음기는 부서지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둘은 서로를 너무나도 좋아했고, 서로에게 소중한 물건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함께 동시에 손을 뻗었다. 때문에 둘의 손이 맞부딪치며 녹음기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며 갈기갈기 부서지게 되었다.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서로 홍당무 녹음기를 지키고, 서로의 사랑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한 행동들인데 결국 서로의 손이 부딪치며 원치 않은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녹음기는 산산조각 났고, 더 나아가 이 둘의 관계도 갈기갈기 찢어지게 되었다.



차라리 '이번에는 내가 홍당무 녹음기를 지킬게'라고 누군가 먼저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그런 소통이 되었다면 서로의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물건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사 소통의 부재로 인해, 서로에게 오해가 생겼고, 결국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되었다.


닉과 주디는 서로 다른 것 뿐이다. 누군가는 이상주의자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현실주의자로 나와 주변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의 마음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깊어지는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더 이상 수용하지 못할 것만 같은 순간은 찾아온다. 그럴때면 서로가 불안하다. 이 소중한 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가 쌓아왔던 좋았던 추억들이 무의미해질까봐 걱정스러울 수도 있다.


그럴때면 평소에 그나마 있던 용기조차도 없어진다. '상대가 떠나갈 수도 있겠다'는 유기불안이 서로를 자극하기 때문에 진짜 나의 솔직한 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기가 힘들어진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상대가 나와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 괴롭다. 그래서 상대가 나와 같기를 바라며, 나의 기준을 상대에게 강요하게 된다.


이것은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될 수 없다. 수직적인 강요고, 일종의 폭력과도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가 나랑 크게 다르지 않았고, 나와 앞으로도 함께했으면 하는 마음에 주디와 닉은 강요와 폭력을 멈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래 소중한 관계가 될수록 이성적이지 못한 순간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으니까. 어쩌면 그런 것이 우리를 더욱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럴 때면 <주토피아2>에서 그랬듯이 서로 잠시나마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물론 둘이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주디는 어쩌다보니 누군가에 의해 어딘가로 질질 끌려갔을 뿐이고, 닉은 눈떠보니 어느 외딴 곳에 갇혀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의도치 않았을지라도 서로 물리적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할 때가 있다. 물리적 거리를 두면 정서적 거리도 자연스레 멀어진다. 그렇게 '나의 연인' 혹은 '나의 소중한 친구'가 아닌, '제3자'처럼 상대를 바라보면 서로의 차이를 보다 온건하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래야만 서로 보다 깊은 관계가 될 수 있다.


물론 모든 경우에 있어서 물리적 거리를 두어라, 혹은 별거, 손절, 이혼을 권고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기 어려울때는 잠시나마 물리적, 정서적 거리를 두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고 말하는 것 뿐이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모든 관계는 갈등이 발생할 수 있고, 의도와는 무관하게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아껴줄 수 있다면, 이 관계는 보다 깊어질 수 있다. 다름을 다름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원래 어려운 일이다. 특히 소중한 사람이라면 '나를 온전히 이해해줬으면' 이라는 욕심이 들기에 더욱 그렇다.


결국 주디와 닉은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고, 심리상담사 쿼카 선생님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가 원만해지는 것은 2년이면 충분하다'는 조언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게 된다. 그 말에 전적인 동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희망적인 문구는 사람들에게 분명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갈등이 가득한 세상에서는 주디와 같은 이상적인 사람이 필요하다. 거기에 닉과 같은 현실성을 갖추면 금상첨화다.


이런 콤비가 우리의 세상에도 존재하기를 바란다. 서로가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이해하고 수용하며 굳게 손잡고 나아가는 그런 콤비 말이다.


더 나아가 때로는 '주디적 사고'를, 때로는 '닉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하나의 사람이 세상에 많아지기를 바란다.


둘의 세상에 주토피아가 있듯이, 우리네 세상에도 유토피아가 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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