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과도 같은, 적당히 좋은 사람
둘리와 고길동을 아시나요?
이 둘은 1980년대 만화인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주인공들입니다. 둘리는 만화의 이름처럼 귀여운 외모를 한 아기 공룡인데, 한창 흥행할 때에는 뽀로로와 하츄핑과 다름없었을 정도로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지요. 둘리는 초능력을 사용해서 나쁜 악당들을 혼내주고 천진난만한 행동들을 보여주는 등 상당히 다양한 매력들을 보여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는 감정이입이 잘되는 주인공이자, 동시에 항상 좋게만 보이는 아이돌과 같은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반면 고길동은 둘리를 괴롭히는 악역처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귀엽기만 한 둘리에게 화를 내며 윽박지르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둘리를 때리고 굶기기도 했지요. 그러다 보니 고길동은 착한 둘리를 학대하는 나쁜 어른으로 기억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착한 둘리에게는 팬들이 많았고 나쁜 고길동에게는 안티팬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고길동은 재평가되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나쁘기만 한 캐릭터가 아니었다에서 시작해서, 심지어는 살아있는 부처와도 같다는 말조차도 나오곤 합니다. '다시 보니 선녀다'라는 말로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인식의 극적인 변화가 참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람을 재평가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니까요. 오랜 기간 동안 나쁜 이미지로 미움받았던 대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람에게 상당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미움을 받던 고길동은 어떻게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이유들을 설명하곤 합니다. 만화를 보던 아이들이 이제는 어른이 되었고, 아이보다는 어른의 입장에서 고길동을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도 이 이유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는지에 따라 같은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정말 자주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생각을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본다면 어떨까요? 어른의 시선이 무엇이길래, 과거 아이의 시선과는 무엇이 다르길래 재평가를 할 수 있었던 걸까요. 다양한 이유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둘리를 보던 아이들이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성숙해질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에 갓 나온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그들에게는 '무조건 좋은 사람'(all good object) 혹은 '무조건 나쁜 사람'(all bad object)만이 존재합니다. 그 중간에 존재하는 것들, 예를 들어 '좋은 면도 있지만 나쁜 면도 있는 사람'과 같은 개념은 아직 어린아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어렵게만 다가옵니다.
무조건 좋은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면 되고 무조건 나쁜 사람에게는 증오하는 마음만 가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좋은 면도 있지만 동시에 나쁜 면도 있는 사람은 우리의 마음에 애증을 불러일으키며 복잡하게끔 만듭니다. 애증은 말 그대로 사랑하고 증오하는 마음이라 서로 상반되는 감정들이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상반된 성질을 가진 불과 물을 한 그릇 안에 넣기가 힘들 듯, 사랑과 증오를 한 마음 안에 담아두는 것도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증오하고, 증오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스스로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애증은 인생의 경험을 충분히 쌓아온 어른에게도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만약 애증의 감정이 감내하기 쉬운 감정이었더라면 나를 힘들게 하는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녀들의 마음이 훨씬 편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앞으로는 부모를 미워하며 평생 연을 끊고 살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부모가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부모를 찾는 경우가 생기지 않았겠지요. 분명 나를 힘들게 했던 부모였고 고마운 마음보다는 미운 마음이 더 크다고 말하면서도 이런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애증이 주는 상당한 혼란감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모를 미워하려고 해도 만약 마음 한켠에는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설령 미움 95% 사랑 5%의 비율이였다고 할지라도 애증으로 인해 마음의 그릇은 난장판이 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혼란스러워하고 괴로워하다가 사랑이 미움을 잠시나마 이겨내게 되는 순간 이 사람은 다시 미워하던 부모를 찾아가게 될 겁니다.
나이를 먹은 어른들조차도 이러한데 세상에 갓 나온 아이들이 애증의 감정을 이해하고 견뎌낼 수 있을까요. 갓난아기들의 마음의 그릇은 성인보다 작을 수밖에 없기에 당연히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부모와 어울리며 느끼는 즐거움, 슬픔, 불안, 분노와 같은 원색적인 감정들조차 혼자 견뎌내기 어려워서, 스스로 감정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부모의 따스한 위로가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마음의 그릇이 쑥쑥 자랄 때까지 어른들의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애증과 같은 격렬하고 복잡한 감정들은 아직 섣부른 감정들이 되겠지요. 그들의 시선에서는 늘 악하기만 한 흑색과 늘 선하기만 한 백색만이 존재합니다. 흑백논리와 같은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악하면서 동시에 선하기도 한 회색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유치원생에게 미적분을 가르치는 것마냥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다시 고길동씨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둘리는 세상에 좋은 일을 하는 천진난만하고 선하기만 한, 무조건 좋은 대상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반면에 고길동은 무조건 좋은 대상인 둘리를 핍박하는, 무조건 나쁜 대상이 됩니다. 고길동이 둘리에게 따뜻한 집과 식사를 제공하고 둘리가 사고를 치면서 발생하는 물질적인 피해들을 배상하고 용서하는 그런 모습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잘 보이지도 않고 마음에 닿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이 만약 고길동의 선한 모습들을 이해하게 된다면 회색이 주는 혼란스러움을 견뎌내야만 하겠지요. 하지만 이들은 그럴 시간에 고길동은 순수한 흑색과도 같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미워하는 것이 편하고 익숙하기에 '둘리-고길동'의 관계를 흑백구도(선악구도)로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아이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해가 될 만도 합니다. 어떤 아이가 둘리를 굶기고 때리는 고길동과 같은 부모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또래 나이의 둘리에게 감정이입이 쉽게 되는 아이들에게는 고길동은 두려운 존재로 비칠 수 있습니다. 또한 보살핌을 받는 것에만 익숙한 나이다 보니, 반대로 보살핌을 베푸는 고길동의 입장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것은 경험의 부재로 인해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아기공룡 둘리를 다시 보면 고길동에 대한 이미지는 바뀌게 됩니다. 분명 어렸을 때 둘리에게 분노를 표현해 대던 고길동은 절대악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와 서보니 만화적 허용을 고려한다면 이 정도의 분노로 그친 것이 참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게다가 사고뭉치인 둘리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배려한 모습들도 보입니다. 무조건 나쁜 대상처럼 여겨졌던 고길동의 좋았던 측면들도 드러나면서, 이제는 적당히 좋은 대상(good enough object)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며 흑색이었던 고길동은 백색으로 온전히 세탁될 수는 없었지만 회색정도로 이미지 탈출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른이 된 아기공룡둘리의 독자들은 이제 고길동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마음들이 있을 수 있겠지요.
1) '아무리 힘든 사정이 있었어도 어려 보이는 둘리를 학대한 것은 잘못이다'와 같은 생각에서 파생되는 분노, 미움과 같은 감정
2) '떠돌이 공룡이었던 둘리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둘리의 잘못을 용서해 준 것은 선한 행동이다'와 같은 생각에서 파생되는 안쓰러움, 고마움과 같은 감정
이처럼 '분노와 미움'-'안쓰러움과 고마움'처럼 다양하고 상반되는 생각과 감정들을 품으면서 고길동은 점점 평면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캐릭터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순수한 흑색과 백색은 하나의 색상으로 표현되지만, 회색은 '이 회색은 정확히 어떤 색일까?'라는 고민을 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흑색의 비율이 더 들어간 다크 그레이 컬러인지 백색의 비율이 더 들어간 라이트 그레이 컬러인지 알아보는 재미가 있지요. 만화캐릭터인 고길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냥 악하기만 한 평면적 인물보다는 상황에 따라 악해지거나 선해지는 입체적인 인물이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길동은 얼마나 선한 인물인가?' 혹은 '고길동은 어떨 때 선한 인물이 되는가?'와 같은 호기심을 가지면서 지켜볼 수 있거든요.
고길동은 아기공룡 둘리에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다면 이제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고길동들이 의외로 많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늘 미운 모습만 보였던 사람도 지속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세세히 살펴본다면 좋은 측면을 보일 수 있습니다. 원리원칙 따지며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고 깐깐한 사수가 알고 보면 후배들에게 열심히 알려주는 좋은 선배일 수 있습니다. 혹은 과한 오지랖을 부리며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중에는 내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예시들은 정말 단편적으로 보여드린 것뿐이고 당장 내 가족, 직장 등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른 예시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분들은 이런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습니다. 미운 사람을 계속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왜 굳이 좋은 점을 찾아서 미운 사람에게 좋은 일을 시켜주는 것일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미운 사람의 좋은 점을 찾는 것은 나를 보다 성숙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수의 결과로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사람에게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합니다. 비록 이번에는 나를 실망시켰더라도 이제까지 함께했던 좋은 추억들을 거름 삼아 상대방의 실수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부정적인 측면에만 매달리지 않고 다른 긍정적인 측면도 함께 살펴가면서 편협한 색안경을 끼지 않고서 균형 잡힌 시각으로 주변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소위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안다고 하는, 보다 성숙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용서할 수 있는 일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실수한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점점 외톨이가 되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상에는 늘 좋기만 한 사람은 없고,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텐데 이와 같은 사람들 주변에 결국 누가 남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이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따뜻한 사랑을 베푸는 부모님들 조차도 실수를 하고 자녀에게 의도치 않았던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울 수 있도록 생물학적으로 설계된 부모-자녀 관계조차도 그렇습니다. 그 외의 다른 사회적 관계에서는 당연히 더 많은 실수와 상처가 생겨날 수밖에 없겠지요.
여기서 미운 사람은 타인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름 아닌 나에게도 적용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에게 가혹한 기준을 세우는 완벽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미워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남들은 이 정도면 잘 해낸 일이라고 칭찬하더라도 완벽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칭찬하지 못합니다. 나는 적당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 무조건 좋은 사람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깨끗했던 거울에 작은 먼지가 하나 들러붙는다고 해서 그 거울이 더럽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에게 조그마한 결점이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이 적당히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결격사유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내가 적당히 좋은 사람이고, 남들이 적당히 좋은 사람이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큰 방해물이 되지 않습니다. 완벽히 좋은 것보다는 오히려 적당히 좋은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인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완벽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오히려 불행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티끌만 한 결점이 보이면 자책하며 결점을 없애려고 노력하기를 반복하다 삶이 점점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남들에게 가벼운 결점이 보여도 비난하며 사람들과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삶이 점점 외롭게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완벽주의자들은 노년에는 피곤하고 외로운 삶을 맞이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인생을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일 텐데 이러한 사연을 듣다 보면 자연스레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곤 합니다.
살다 보면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분명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감정을 추슬리고 돌이켜보면 이 정도면 그만 미워할 수 있겠다고 느껴지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비록 온전히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온전히 나쁜 사람도 아닌 사람. 그 사람이 나의 세상에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주고 나를 성숙시켜 줄 수 있는 적당히 좋은 사람은 아닐까요.
여러분의 세상에는 고길동과 같은 사람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