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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리 Mar 07. 2024

직접 겪은 저출산의 공포

저출산이 남의 일이 아니다

4분기 출산율이 0.65이다. 저출산이 심각하다고 난리다. 호들갑 떠는 TV 뉴스 말고, 내가 직접 겪은 무시무시한 저출산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


나는 결혼하면서부터 남편 따라 한국의 지방 도시로 이사를 갔다. 그 곳에서 10년을 살았다. 그 10년동안 아이 셋을 낳았는데, 같은 산부인과에서 셋을 3, 4년 터울로 낳았다. 그런데 첫째, 둘째, 셋째 낳는동안 그 산부인과 변화가 너무나 충격적이었기에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적어본다.


2014년 첫째를 임신했을 때는 산부인과 혼자서 4층짜리 큰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산부인과 의사만 자그만치 5명이었다. 1층에는 산부인과 진료실, 소아과, 약국이 모두 있었다. 2층은 산부인과 분만실, 3층은 분만 후 입원실, 4층은 산후조리원이었다. 임신해서 정기진료 받을 때도 대기실에 항상 임산부가 꽉 차 있었다. 대기 산모가 제일 적은 의사로 배정받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한참 신혼이던 시절이라 마냥 행복했다. 첫째 아이라서 나름 태교도 하고, 예쁜 임부복도 차려입고 다녔다. 남편과 손잡고 대기실에 앉아서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키득거리던 추억이 생생하다.


첫째아이를 낳으러 가던 날에는 2층 분만실도 꽉 차 있었다. 1년 중에 애 안 낳기로 유명한 12월이라는데도 애 낳는 사람들이 그리 많았다. 양수가 터져서 급히 병원에 가서 배정받은 방에서 진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취의사가 와서 무통주사도 놓았다. 진통이 다가오니 슬슬 겁이 나는데, 옆방에서 애 낳느라 고래고래 악 쓰는 소리, 앙앙 우는 애기 울음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왔다. 같은 시간에 출산이 많다보니 간호사들도, 의사들도 이 산모 보러 갔다가, 저 산모 보러 갔다가 분주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기를 낳고 어기적 어기적 걸어서 신생아실에 아기를 보러 갔다. 신생아실 유리창 사이로 보이는 20명쯤 되는 뽀얀 아기들. 하얀 속싸개를 하나같이 하고서 천사 얼굴로 바구니 안에서 자고 있었다. 내 아기는 어디에 있나 싶어 찾고 있는데, '이주리님 아기'라고 적힌 통통한 아기가 곤히 자고 있었다. 갑자기 감격에 젖어 가슴이 찡해져서 눈물이 났다. 복도에 붙어있는 칠판에는 분만 현황이 빼곡했다.   


분만을 했으니, 3층 회복실로 옮겨가야 했는데, 하도 산모가 많아 일반실이 꽉 찼다고 했다. 남아있는 회복실은 vip실밖에 없었다. 가격이 훨씬 더 비쌌지만, 출산의 기쁨에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첫손주인지라 친정, 시댁에서 다같이 와서 기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조금 더 넓고 쾌적한 vip실에서 남편도 같이 자면서 아기도 데려와 놀고 그랬다. 병원에서 아는 얼굴도 많이 만났다. 마침 남편 동료 부인도 아기를 낳으러 와서 반가워하며 같이 축하하고 수다떨고 그랬다.


나는 산후조리원은 안갔고, 집에서 산후조리 아주머니를 불러서 조리를 했다. 조리원이 워낙 비싸기도 했고, 그 비용으로 집에서 아주머니 불러서 조리를 조금 더 오래 했다. 남편도 산후휴가가 일주일 나왔기 때문에 내 집에서 편하게 남편하고 아기의 첫순간을 같이 하고 싶었다. 애기 속싸개도 할 줄 모르는 초보 엄마아빠가 밤새 엉엉 우는 신생아를 엉거주춤 안고, 어쩔줄 몰라 하던 그 시절이 애틋하다.


4년 후에 2018년 둘째를 임신해서 산부인과를 찾았을 때, 병원 규모 자체는 차이가 없었는데, 의사가 3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리고 대기 산모가 아무도 없었다. 접수하자마자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었다.


둘째 아이를 낳으러 가던 날은 분만실이 한적했다. 첫째때처럼 옆 방에 애 낳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조용히 낳았다. 시간대가 안 맞아서 무통주사도 못 맞고, 조선시대 사람처럼 쌩으로 애를 낳았다. 복도에 적힌 분만현황을 보니 회복중인 산모가 5명쯤 있었다. 그 큰 신생아실에 아기가 5명만 덩그리 놓여 있으니 썰렁했다. 첫째 낳으러 왔을 때는 분만실, 회복실이 모두 꽉 차 있었고, 산모와 남편, 축하 꽃다발 들고 드나드는 조부모들로 엄청 활기찬 분위기였는데, 참 많이 달라졌다. 차분하달까. 이번에도 아기를 데리고 집에 가서 산후조리 아주머니를 불러다 조리를 했다.


3년 후, 2021년 셋째를 임신했을 때, 산부인과가 아예 달라져 있었다. 1층은 현대자동차 대리점이 되었다. 약국은 아예 없어졌고, 그래도 소아과는 있었다. 2층은 산부인과 진료실, 3층은 산부인과 분만실, 4층은 산후조리실로 쓰고 있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의사가 단 한 분이라는 사실이었다. 의사 선생님 한 분이 진료도 보고, 분만도 한다 했다. 분만은 365일 24시간 언제 호출될지 모르는 일인데, 과연 혼자서 가능하실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의사 선생님 나이도 1965년생으로 적지않은 나이였다. 진료만 여기서 보고, 분만은 더 큰 도시에 가서 해야하나 고민을 진짜 많이 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대도시에 원정출산한다고 몇달동안 가 버리면, 위에 애들 둘을 봐줄 사람이 없었다. 그때는 코로나 시기여서 애들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거의 안 갔다. 집에서 애도 보고 살림도 해야 하는데, 대신 해 줄 사람이 없었다. 돈도 없었다. 남편 혼자 외벌이인데 4인 가족 나가야 할 돈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원정 출산한다고 몇 달이래도 두집 살림하면 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 또 괜히 원정 출산한다고 갔다가 코로나라도 걸리면 어떡하지, 나는 산모라서 백신도 안 맞았는데, 고민에 고민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결국 의사 선생님을 믿고 이 곳에서 낳기로 했다. 위에 애들 둘 받아준 의사 선생님을 믿고 낳자.


그래도 이번에는 산후조리원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위에 애들이 둘이나 있으니, 집에 산후조리 아주머니가 오신데도 조리가 안될 것이다. 남편도 큰 애들 때문에 이번에는 내 조리를 도와주거나, 신생아를 봐주기는 힘들것 같다며, 마지막이니 산후조리원에서 아기하고 푹 쉬고 오라 했다. 그래서 막달에 다니던 산부인과 4층에 산후조리원 상담을 했다. 그런데 상담실장 선생님 말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산후조리원 이용하실 수는 있는데, 죄송합니다만, 모자동실하셔야 하고, 별도 프로그램은 없고, 식사준비, 일주일에 두번 산후마사지 정도 밖에 못해 드립니다."

"네???"

"코로나 시기이다 보니, 아무래도 면역이 약한 신생아와 산모를 보호하기 위해서 프로그램이 취소가 되었어요. 그리고 지금 산후조리원에 산모가 한 명도 없어요."

"한 명도 없다고요?"

"네... 코로나 시기이도 한데, 출산이 정말 많이 줄었어요. 시 전체에 작년에 비하면 출생 수가 절반도 안되거든요.

"그렇게나 심각한가요?"

"네... 올해는 시 전체에 출생아가 900명도 안되거든요. 아직 12월이라 통계가 다 나온건 아닌데.... 그 전에는 한 해 2000명 정도 되었거든요"


이번에는 산후조리원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코로나 시기에 어린이집도 못가는 큰 애들 둘 데리고,남편과 산후도우미 아주머니와 마스크를 쓰고 신생아를 끌어안고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수 밖에. 또 조선시대 사람처럼 해야 하는구나...


드디어 셋째를 낳으러 가던 날이 왔다. 정확히 밤 12시였다. 셋째는 워낙 진행속도가 빨라서 진통이 오자마자 너무 심했고, 곧 아기가 쏟아질 것 같아서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베테랑 애아빠답게 남편은 익숙하게 분만실로 달려갔지만, 분만실에 불이 깜깜하게 꺼져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진통으로 괴로워 하고 있고, 남편은 일단 복도에 불을 켜고, 방마다 다니면서 문을 열고 다급히 소리쳤다. "여기 아기 있어요!!!" 남편이 엉성한 한국말로 소리를 쳤다.


그러자 방에서 간호사들이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워낙 산모가 없으니 밤도 늦었고, 빈 방에서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불을 켜고 잠이 덜 깬 채로 나오는 간호사에게 말을 했다. "아기 낳으러 왔는데요. 진통이 와서요." 그러자 간호사가 차트를 들고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첫째아인가요?" 내가 셋째라고 하니 갑자기 간호사가 깜짝 놀라면서 다른 간호사들을 다급히 불러제끼고 나를 급히 분만실로 데리고 갔다. 급히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있는데, 간호사가 벌써부터 아기 목욕물과 체중계를 들고 들어왔다.


"이걸 왜 벌써 가지고 와요? 애기가 나올려면 한참 남은거 아니에요?"

"산모님! 지금 애기 나오고 있어요!!"

"그럼 관장도 안해요? 제모는요?"

"산모님, 지금 금방 애기 나옵니다! 바로 애기 낳을게요."


조금 있다가 의사선생님이 들어왔고, 갑자기 진통이 엄청 심하게 왔고, 죽네사네 울면서 악을 쓰고, 4킬로짜리 통통한 남자아기가 나왔다. 이번에도 무통주사도 못 맞고 쌩으로 낳았다.       


아기를 낳고 미역국을 한 그릇 먹고 나니 그래도 기운이 났다. 셋째라 그런지 모든 것이 여유 있었다. 분만실을 둘러 보는데 모두 비어 있었다.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 큰 신생아실에 갔더니 아기가 딱 둘만 있었다. 복도에 적힌 분만현황에는 산모 3명만 쓰여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베트남 이름인데, 이미 퇴원한 것 같았다.


신생아는 예방접종 맞을 일이 많다보니, 셋째를 데리고 소아과를 자주 가게 되었는데, 소아과 대기실에 신생아를 안고 앉아있는 부모들은 한국 아빠와 베트남, 필리핀, 태국 엄마가 대부분이었다. 소아과에서 아기 안고 옆에 애엄마하고 이런저런 아기 이야기 하는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는데, 이 외국엄마들하고는 말이 안 통해서 그마저도 못했다.


내가 몸소 느낀 2014년과 2018년, 2021년 사이에 산부인과 풍경을 공유해본다. 아기를 받는 산부인과가 문닫고 있고, 지금은 어린이집이 문 닫고 있다. 곧 유치원에 닥칠 일이고, 몇년 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 순으로 닥칠 일이다.  


산후조리 상담실장이 했던 이야기가 워낙 믿을 수가 없어서 정말 그런가 싶어 나중에 시청 홈페이지 가서 통계 자료도 찾아 보았는데 정말 그랬다.


첫째 낳았던 2014년도에 신생아 수가 3383명, 둘째 낳았던 2018년도에 2068명, 셋째 낳은 2021년에 1218명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그럼 2027년에 내 직장은 어떻게 되는거지? 나는 초등학교 교사이다. 내가 살고있는 도시에 초등학교가 총 39개가 있다. 당장 21년생이 27년에 초등학교 갈 때가 되면 1218명이 39개 초등학교에 나눠서 가야 하는데, 계산해보면 한 학교에 배정되는 신입생이 31명이다. 각 학교에 신입생이 한 반밖에 없다니! 선생님이 남아돌텐데 내 거취는 어떻게 되는걸까?


저출산이 진짜 남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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