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친구에게 부치는 편지

이제는 볼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친구를 그리며...

by 초록빛보라

한 친구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학생으로 처음 만났다. 주황색 패딩에 숏컷 헤어. 첫인상은 센 언니 같았고 한눈에 봐도 그냥 노는 언니 같았다. 나랑 놀 일은 없을 것 같았던 예쁘장한 얼굴에 주근깨와 보조개가 귀여웠던 친구. 그런데 친구들 탐색 기간인 3월 어느 날 그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나 쟤네들이랑 놀기 싫어."

속사정을 알고 보니 같은 학교에 동갑인 사촌이 있는데 이 아이가 정말 노는 아이였고, 자신은 사촌이라는 이유로 자꾸 무리에 끼라고 하는데 그러기가 싫다는 것이다. 학급 반장이라 수업이 끝나도 자주 교실에 남아있던 내게 숨겨달라고까지 말했다. 사촌의 친구 무리들은 교실을 기웃대다 그냥 돌아갔고 이게 몇 번 반복되니 더 이상 친구를 찾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 둘은 친구가 되었다.


우리 집은 학교와 꽤 멀어서 걸어서 40분이 걸렸는데, 그 중간에 친구 집이 있어 오고 갈 때 만나서 같이 학교를 다녔다. 나는 일곱 살 때 아빠가 돌아가셔서 계속 엄마와 살았었는데, 알고 보니 친구는 아빠가 있는데도 사업 실패로 따로 살고 있었다. 뭔가 잘 통했다. 마음에 항상 뭔가를 담아두는 나와는 달리 화통하고 뒤끝 없는 성격의 친구가 나는 정말 좋았다. 더 좋았던 건 친구의 엄마가 내가 공부 잘하고 반장도 하는 모범생이라고 늘 칭찬을 해주셨던 것이다. "보라는 학원도 안 다니는데 어찌 그렇게 공부를 잘 하노?" 그 말이 끝나면 자동으로 친구를 타박하는 말이 이어졌지만 친구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그냥 씨익 웃어넘겼다.


2학기에 우리는 HOT로 더 친해졌다. 친구는 '클럽 HOT'에 가입했다고 하더니 가을 어느 날 대구에 콘서트를 보러 간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그 콘서트에서 사상자가 났었고, 휴대폰도 없던 시기여서 뉴스를 보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멀쩡히 돌아와서는 공연 후기를 들려주는 친구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겨울방학 땐 친구 집에서 캔디 춤을 연습하고 온 동네 문구점을 다니며 굿즈를 사 모았다. HOT의 인기가 계속 올라간 것처럼 우리 우정도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2학년이 되었는데 1/7 확률을 뚫고 또 같은 반이 되었다.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서로가 좋아하는 사람의 동향을 살펴주고 교환 편지도 적었다. 솔직한 친구는 진작 고백을 했고 사귀진 않았지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겨우 용기를 내어 1학기 방학식날 좋아하던 오빠에게 고백 편지와 선물을 주었는데 그날 곧바로 선물이 돌아왔다. 거절의 뜻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괜찮은 척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친구의 위로도 와닿지 않았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우리 술 마실래?"


친구네 집은 엄마가 일 가시는 시간이면 항상 비어있었다. 그리고 신분증 검사가 있긴 했지만 부모님 심부름 왔다고 잘 꾸며대기만 하면 미성년자도 술을 살 수 있었던 시기였다. 다른 친구가 나섰다. 그래도 큰 마트엔 갈 수 없고 어느 구멍가게에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계시니 거기에 가서 본인이 사보겠다고 했다. 그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열다섯 사춘기 소녀들은 참으로 용감했다. 콜라에 소주를 섞어서 몇 잔을 마셨더니 정신이 핑 돌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가겠다는 내가 안 돌아와서 찾아 나섰더니 변기에 앉아 자고 있었다고 했다. 인사불성이 된 나는 방으로 들어와 잠깐 누워 잠을 잤다. 일어나 보니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 때문에 엄마한테 혼날까 봐 친구들이 양치를 시켜주고 껌도 사 주고 게다가 집까지 가는 길을 부축까지 해주고 아주 고생을 했다. 집에 가서는 너무 놀아서 피곤하다 하고 누워 잠들어 엄마한테는 안 들키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열다섯 인생 첫 일탈이었다. 짜릿하면서도 후련했고 친구에게 고마웠다.


3학년 때는 같은 반은 되지 못했지만 점심시간에 도시락만은 항상 같이 먹었다. 친구는 우리 엄마가 만들어 준 오징어볶음을 제일 좋아했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 지시로 우리 반 학급 게시판에 붙이려고 작품을 만든 적이 있는데 마음에 안 드신 건지 다른 친구에게 그걸 버리라고 하여 쓰레기장에 버려놓은 걸 발견했다. 너무 화도 나고 충격이라 친구한테 이야기했더니 자기 반 학급 게시판에 가져다 걸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반 담임 선생님도 그 반에서 수업할 때 볼 것이고 나름의 복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다. 늘 말 못 해 끙끙대고 속앓이를 하는 나의 마음을 토닥여주고 대신 화도 내주고 했던 건 항상 이 친구였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나는 동네에 유일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친구는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상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자칫 서먹해질 수도 있었지만 친구가 내가 살던 동네로 이사를 오면서 주말에 간간히 만나면서 지낼 수 있었다. 다행히도 이사한 집에서는 친구가 아빠와 같이 살 수 있었는데, 늘 볼 때마다 딸을 "우리 공주."라고 부르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웠었다. 친구는 일찌감치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남자 친구도 사귀었다. 어느 날은 떡볶이집에서 만나자고 하더니 자기가 임신을 했는데 어쩌면 좋겠냐고 했다. 연기가 완벽했다면 끝까지 속았겠지만 장난인 걸 알면서도 장난치지 말라고 말하지 못해서 끝까지 속은 척을 했다. 그런 장난에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친구였다. 그리고 10년쯤 뒤에 친구는 결혼을 하고 정말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


그 사이 나는 고3 첫 입시에 낙방하고는 스물넷에 교대에 입학하기까지 수험 생활을 오래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구와 연락이 뜸해졌다.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했는데 어느 날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같이 갈 친구가 없어 여동생과 함께 대절 버스를 타고 다녀왔는데 오는 길에 뽕짝이 울려 퍼지는 버스 안에서 친구 아줌마는 사정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10년 뒤에 나는 다시 아줌마의 눈물을 마주해야 했다.


친구는 계속 직장을 다니다 임신을 하고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아직 대학생, 취준생이었고 과외 알바로 항상 바빠서 전화로만 연락하고 직접 만나지 못했다. 아직 결혼, 임신, 출산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전혀 무지했다. 힘들 친구를 챙기지도 못하고 출산 선물 하나 보내지 않았다. 내가 찾아간 것은 친구가 둘째를 출산하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때 아기 옷을 하나 사서 갔었는데 한참이 지나고 내가 아이를 낳고 나니 그때 사갔던 아이 옷의 사이즈가 정말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친구는 서운하다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리고 5년 정도가 흘러 내 결혼식에 초대하기 위해 청첩장을 보낼 때 친구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의 보조개 미소는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늘 다이어트를 이야기하더니 예전보다 날씬한 모습이어서 더 예뻐 보였다. 그때 헤어진 후로 우리는 다시 각자 삶을 바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를 우연히 마주친 건 제법 큰 아동병원에서였다. 너무 뜻밖이라 어쩐 일이냐고 물으니 친정에 잠깐 왔다가 큰 아이가 아파서 데려왔다고 했다. 그때가 추석 명절쯤이었고 나는 둘째를 임신 중이었는데 친구가 첫째 낳을 때도 제대로 못 챙겨서 미안하다고 둘째 낳으면 꼭 선물을 보낼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병원 진료를 먼저 마친 친구가 집으로 돌아가고 그날 저녁 친구와 오랜만에 톡을 주고받았다.



육아 이야기를 어느 정도 나누고 주소를 알려주고는 그렇게 다시 우리 연락은 끊어졌다. 둘째를 낳고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왠지 선물 안 보내냐는 시위로 보일까 봐 연락을 못 하던 참에 어느 날 갑자기 친구 이름으로 톡이 왔다. 그런데 그건 출산 선물을 보낸다는 연락이 아니었다.



그건 친구의 부고장이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믿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둘째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을 하려고 했는데 톡을 보자마자 재빠르게 장례식장까지 길 찾기를 했다. 원래 세종에 살던 친구는 그 사이에 인천으로 이사까지 했다. 그걸 부고장을 보고서야 알았다. 장례식장까지는 차로 3시간 30분이나 걸리는 거리였고 도저히 운전하기는 무리일 것 같아 대중교통을 찾아보았다. KTX를 타고 지하철을 타면 그래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급히 어머님께 말씀드려 아이를 맡기고 장례식장으로 나섰다. 눈물을 꾸역꾸역 집어삼키며 겨우 장례식장에 도착했는데, 공주 친구가 왔다며 엄마, 아빠, 고모가 모두 나와 맞아주시며 엉엉 우셨다. 그제야 나도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남편분과도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는데 장소가 장례식장이라니..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홉 살 큰 아들은 너무 의젓해 보여 눈물이 났고, 장난을 치던 여섯 살 둘째 아들은 철부지 어린것이라 눈물이 났다. 이 애들을 두고 어찌 갔을까 싶어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친구 고모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선물 이야기를 하며 먼저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친구도 내가 아이 낳고 몸조리하느라 힘들고 자기 투병하는 모습 보이기도 부끄러우니 연락을 하지 마라고 했다고 한다. 남편분은 그래도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못해서 미안하다고 우셨다. 친구는 나와 헤어지고 그 해 12월에 처음 병원 진료를 받았다. 계속 몸이 피곤하고 속이 계속 안 좋아 갔던 것인데 으레 두 아들 키우며 육아로 힘든 것이라 생각하고 심각한지 몰랐단다. 그런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해서 조직 검사를 받은 결과 복막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진행이 너무 많이 된 상태라 그 길로 입원을 하고 1월부터는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져만 갔다.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수척해졌고, 친구들에게는 어떤 연락 없이 혼자서 가족들과 그 외로운 싸움을 하다 하늘나라로 간 것이었다. 음식을 먹을 수가 없으니 매일 음식 사진을 찾아보는 것이 일과였다고 한다. 설 명절에는 집에 꼭 가보고 싶다고 겨우 병원의 허락을 받아 잠시 앉아있다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단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핏덩이 같은 자식을 두고.. 얼마나 슬프고 힘들었을까?


친구를 하늘로 보내고 결심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연락이 뜸한 지인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것, 그리고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받는 것. 그런데 막상 살다 보니 하루하루가 버거워 결심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 친구를 보낸 지 2년이 넘고서야 겨우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산으로 휴직을 오래 하여 건강검진을 제대로 받지 않았는데 갑자기 가슴 한쪽이 아파서 지난주에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가슴에 멍울이 있으니 조직 검사를 해야겠다고 하셔서 검사 후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러고 나니 다시 친구 생각이 났다. 요즘 유독 피곤하고 힘들었는데 나도 암이면 어쩌지? 이 길로 내 아이들과 생이별을 해야 한다면? 계속 안 좋은 생각이 든다. 친구야, 너는 얼마나 힘들었니? 많이 아프고 두려웠지? 지금은 편안하니? 당장 죽을 것 같은 마음에 계속 지쳐만 간다. 피를 말리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딱 2전 오늘 10개월 된 둘째를 차에 태우고 친구가 있는 납골당에 다녀왔었다. 보고 싶은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국제 유아교육전을 보고 싶다는 명목으로 2박 3일 무모한 용기를 낸 것이었지만 사실은 납골당에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마침 그날 보슬보슬 비가 내렸고, 붙이지 말라는 안내에도 불구하고 예쁜 국화 송이를 사다가 친구 자리에 붙였다. 또 눈물이 났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엄마 친구 예쁘지?"



친구야,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니 네 생각이 너무 많이 난다. 죽음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너무 쓰리고 아파서 눈물도 나고.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살지 않으니 얼마나 갑작스럽고 황망했을지 다시 마음이 아프면서도 나도 갑자기 안 좋아질까 봐 너무너무 두려워. 연락도 자주 하고 자식 자랑도 하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좋았을 걸.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했던 지난날을 용서해 줄래? 그리고 내 두려운 마음을 위로해주라. 죽고 싶다고, 죽겠다고 결심했던 때도 있었는데 막상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살고 싶어 진다. 지금이라도 너와는 하지 못한 살가운 연락을 한 사람씩 해보려고 해. 언제까지인지는 모르지만 내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다가 갈 테니 그때 우리 반갑게 다시 만나자. 사랑해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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