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풀 Jan 11. 2021

날아라, 씨앗



모과 씨앗을 심었다.

지난가을 산책길에서 주워온 모과 중 가장 예쁜 것을 골라 반으로 갈랐다. 조심성 없는 나의 칼질에 씨앗들도 반으로 잘렸다. 혹시나 해서 안쪽을 파보니 반토막난 씨앗 밑에 또 한 줄의 씨앗이 숨어 있었다. 어깨를 맞대고 오밀조밀 들어앉은 작은 것들.


'넌 정말 많은 씨앗을 품고 있구나!'


씨앗을 물에 담가 놓고 적당한 화분을 찾기 위해 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로로 긴 플라스틱 화분 여러 개가 눈에 띄었다. 허브가 만발한 정원을 꿈꾸며 야심 차게 구입했던 화분들이었다. 인터넷으로 구입한 허브 씨앗만도 10종이 넘었다. 그때 포스팅해 두었던 7년 전 블로그 글을 찾아보니 내가 심은 꽃씨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로즈메리, 카모마일 로만, 스피어민트, 잉글리시 라벤다 라반스 퍼플, 라벤다 엘레강스 핑크, 라벤다 엘레강스 스카이, 레몬그라스. 여기에다 임파첸스 템포 워터메론, 뉴기니아 임파첸스 디바인 라벤다, 사포나리아 오시모이데스 등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꽃씨와 글라디올러스와 튤립 구근까지. 바리바리 배달된 씨앗 봉지를 펼쳐놓았을 뿐인데 마치 허브 향 가득한 정원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싹을 틔우기 위해 딸내미 기저귀 소창에 물을 뿌리고 물묻힌 이쑤시개로 생쥐 눈곱만 한 씨앗을 하나하나 소창에 옮겨 구들방 창가에 두었다. 어떤 환경에서 발아율이 높은지 실험하기 위해 나머지 절반의 씨앗은 비닐 모종 포트판에 심었다.


그해 봄, 파릇하게 올라온 싹들을 모두 마당에 옮겨 심었는데 그 허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지금 우리 집 마당에 남아있는 건 하나도 없다.  글라디올러스와 튤립 구근은 얼어 죽었고 나머지 꽃들은 환기, 배수, 토양에 문제가 있었는지 어느 순간 하나씩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우리집 마당에 잠시 왔다 사라진 꽃들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한껏 들뜬 마음에 잔뜩 심었다가 돌봄의 손길을 받지 못해 사라진 가엾은 것들. 지금 남아있는 아이들은 저절로 자라나는 다년생 들꽃들 뿐이다.


그게 어디 꽃씨뿐이랴?

수많은 욕망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발아했다가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7년 전, 애지중지 키웠던 허브 씨앗들

  

이 한파 속에서 다시 마음이 동했다.

흙냄새 맡으며 씨앗을 심고 싶었다.

화분을 하나 꺼내 씻은 다음 마당에 있는 모래와 원예용 상토를 섞어 집안으로 들여왔다. 물에 불은 씨앗을 잘 말린 다음 손가락으로 폭신한 흙을 눌러가며 하나씩 가지런히 흙속에 묻었다. 닷새쯤 뒤에 연둣빛 싹들이 새초롬하게 올라왔다. 엄마 뱃속에서 막 태어난 아기처럼 말간 얼굴을 한 떡잎이 겨울 햇살을 향해 조그만 날개를 펼쳤다. 식물 연쇄살인범의 손을 빌어 발아한 여리디 여린 싹들. 이 코딱지만 한 새싹이 과연 모과나무가 될 수 있을까? 아이를 키우 듯 제때에 보살필 수 있을까? 지난날 내 생활 패턴을 생각하면 이번에도 장담하기 어렵다. 우주까지 목기운이 뻗쳤다가 어느 순간 땅속까지 곤두박질쳐버리는 오랜 습성. 그래도 씨앗을 심는다.

명랑하게 날개를 펼친 새싹이 인사를 건넨다.

"오늘도 안녕, 안녕!"

싹을 솎아주고 화분에 옮겨 심어야지. 우리 집 마당에도 심고 이웃에게도 하나씩 나눠줘야지. 언젠가 내가 원하는 멋진 정원도 가질 수 있을거야. 계속 해보는거야.


마음에도 작은 씨앗 하나 심어야겠다.

바람에 떠다니는 홀씨처럼,

이보다 더 가벼울 순 없다는 듯.

자유롭게 날아라.

내 모든 씨앗들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