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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섭 Jul 23. 2022

직설적인 화법에 자부심을 느끼던 나도 이제 사회인이라구


       

 “오빠 저 이쁘죠?”


 대학교 1학년이었던 2014년. 당시 나는 재수를 했기에 대학교 동기들보다 1살이 많았다. 동기 중 한 명이 놀러 갔다가 찍은 사진을 내게 보내 준다. 천사 날개가 달리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었나 보다. 그 동기는 자기가 이쁘지 않냐며 물어본다.


 “개 못생겼는데?”


 솔직하게 말했다.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기 위해 한 말이 아니다. 그냥 진짜 못생겨서 못생겼다고 했다. (소위 말해서 부랄친구 급의 친밀도가 있었다면 이 대답이 크게 문제없었을 거다. 하지만 당시 나와 그 동기는 친하긴 했으나, 그 정도로까지 친밀하지는 않았다.)


 물론, 빈말이라도 좋은 말을 해줄 수 있었겠지.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냐고? 그건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뒤에서 할 말을 앞에서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속에 있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멋있는 사람이라 여겼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직설적인 화법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 오빠 장난하지 말고요 ㅋㅋㅋㅋㅋㅋㅋ”


 다행히. 그 동기에게는 내 말이 장난으로 들렸나 보다. 못생겼다 말하는 내 대답을 듣고도 웃는다.


 “진짠데...”


 이후로 그 동기와 이런 레퍼토리가 반복이 되었다. 한 날은 강의실에서 그 동기가 내게 본인이 이쁘지 않냐며 또 물었다. 그 말을 듣고 귀찮음이 몰려왔다. 안 이쁜데 왜 자꾸 이쁘냐고 묻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진짜 구라 안 치고. 내가 살면서 봤던 사람 중에서 탑 클라스로 못 생겼어.”

 “아 장난치지 말고요!!”


 또 내 말을 장난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이 말을 듣고도 얼굴에 장난끼 가득한 웃음을 띄고 있다.




 “수혁아. 애 상처받는다. 하지 마~”


 그때 같은 수업을 듣고 있던 한 복학생 행님이 말을 걸었다. 애가 상처받는다면서 나를 제제시켰다.


 “겨우 이런 걸로 상처받으면 세상을 어찌 살아갑니까?”


 역시나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뱉었다. 그 당시의 나는 ‘상처’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상처를 받는다는 둥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말했는데 그게 왜 상처란 말인가? 고작 그런 걸로 상처를 받으면 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라고 그러는가?


 “띠리리리리...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뭘까? 나의 확고한 철학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그 동기를 포함하여 서서히 멀어지는 인간관계가 많아졌다. 아니. 많아진 것이 아니라 원래 그랬다. 나 같은 또라이들 말고는 오랫동안 유지되는 인간관계가 적었으니까.


 물론, 결이 맞지 않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내 협소한 인간관계를 그렇게 단순히 표현하기는 힘들다. 어느 선까지는 빠르게 친밀해지지만, 그 이후부터 서서히 멀어지는 레퍼토리가 반복되었거든.


 내가 눈치를 보지 않아서 그렇지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의 눈빛, 행동, 말투에서 나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게 딱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자존심을 부린다고 오히려 쿨한 척 행동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겉으로는 쿨한 척 했지만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내게 문제가 있었다는 점 말이다.


 ‘사회성 부족’


 아무것도 없는 내가 스스로의 문제를 진단해보자면 ‘사회성 부족’이라는 딱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거의 짐승 수준의 사회성을 갖추고 있지 않았나 싶다.


 ‘일단 입을 다물어 볼까?’


 나이가 들면 주둥이를 닫고 지갑을 열라는 말이 있다.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 하는 꼰대들을 저격하는 말이다. ‘아마도 내 입이 그 꼰대들의 입과 같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했냐고? 정답은 하나지 뭐겠냐. 굉장히 단순하다. 그냥 입을 다물면 된다.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하지 못 한다면, 그냥 말을 안 하면 된다. 그래서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그 덕인지 어느 순간부터 예전에 느꼈던 그 불편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서서히 멀어지는 인간관계가 있긴 있다. 하지만 이 멀어짐은 자연스러움 속에서 흘러간다. 서로 결이 맞지 않거나 물리적‧사회적 거리로 인한 멀어짐 말이다.


 “대표님! 오늘 무슨 일 있습니까? 왜 이렇게 멋있게 입고 오셨습니까?”


 그렇게 사회인이 되어가는 걸까? 이제는 꽤 발전했다. 상사에게 적당한 아부도 할 수 있다.


 “오~ 네일했나? 이쁜데?”


 친구에게 빈말도 잘한다. 나도 이제 완전한 사회인이 되었나 보다. 안 멋있어도 멋있다고 말하고 안 이뻐도 이쁘다고 말해줄 수 있으니까. (아, 물론, 부랄 친구급의 유대관계가 있는 사람에게는 팩트 폭행을 꽂는다.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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