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나무
어떤 날은 노을이 밤새도록
계단을 오르내리죠
그 노을에 스친 술잔은 빛나기 시작하죠
그뿐이죠
그저 그뿐인 것에 시선이 가죠
술을 삼키거나 회를 삼킬 때마다
떴다가 지는 노을이에요
그의 목에 있는 노을을 건드리고 싶지만
내가 사는 곳은 동쪽이라
손댈 수 없죠
술을 마시고 마셔도 내 목에는
노을 지지 않죠
시간만 가죠
밤이 뛰어오죠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죠
노을 가까이에 다가갈 방법을 알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란 것도 알죠
그는 노을과 함께 곧 이 섬을 떠나죠
그뿐이고 그러니 오늘뿐이고
모든 것들은 원래 다 그렇죠
봄날의 꽃처럼
한철 잠깐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죠
올해는 오늘까지만 아름답다,
이렇게요
「노을 말고, 노을 같은 거」
이원하 詩集『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 2020)
햇살이 그대의 목에 기인 노을을 걸어놓을 때, 나는 섬으로 밀려오는 파도들을 걷어내고 있었다. 발이 젖어왔다. 오늘은 별이 밝을 거 같아요. 그대가 노을보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때면 그대의 그림자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꽃이 지는 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일찍인지는 몰랐네요. 바람에 날리는 꽃잎들을 걷어내며 나는 천천히 어두워지는 오늘의 끝으로 걸어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