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나무
네가 들어갈 때 나는 나오고 나는 도시로 들어오고 너는 도시에서 나간다
너는 누구인가 내가 나올 때 들어가는 내가 들어올 때 나가는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 도시에서 태어났지, 모든 도시의 어머니라는 그 도시에서 도시의 역전 앞에서 나는 태어났는데 너는 그때 죽었지 나는 자랐는데 너는 먼지가 되어 도시의 강변을 떠돌았지 그리고 그날이었어 전철문이 열리면서 네가 나오잖아 날 바라보지도 않고
나는 전철문을 나서면서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는 누구인가 너는 산청역의 코스모스 너는 바빌론의 커다란 성 앞에서 예멘에서 온 향을 팔던 외눈박이 할배 너는 중세의 젖국을 파는 소래포구였고 너는 말을 몰면서 아이를 유괴하던 마왕이었고 너는 오목눈이였고 너는 근대 식민지의 섬에서 이제 막 산체스라는 이름을 받던 잉카의 한 아이였고 너는 인사동 골목의 식당에서 연탄불에 구워져나오던 황태였고 너는 나에게 멸치를 국제우편 소포로 보내주던 현숙이었지
나는 전철문을 나서면서 대답하다 나는 고대 왕무덤에서 나온 토기였다가 그 토기의 입이었다가 텅 빈 세월이었다가 구겨진 음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창녀의 바 창문에 걸린 커튼이었지 은행 금고 안에 든 전쟁이었다가 아프가니스탄 고원에 핀 양귀비였다가 나는 실향민 수용소의 식당에서 공급해주던 수프였다가 나는 빛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언제나 서 있기만 했던 시였지 그리고 일용 노동자로 눈 덮인 거리를 헤매던 나의 혈육이었지 저 멀리 용산참사의 시체가 떠내려가던 어떤 밤에 아무런 대항할 말을 찾지 못해서 울던 소경이었어
포도송이였어 그 들판에서 자라던 자줏빛 도라지꽃이었어 그래 아직도 살쾡이였어 도시의 검은 밤에 길을 건너던 산돼지였어 먼 사랑이었고 사랑의 그늘이었지 도시 골목의 어느 카페에서 마시던 유자차였고 그리고 웃으면서 헤어지던 옛 노래였지 나는 너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닫히는 전철문 앞에 서서 먼 구멍으로 들어가던 내가 사랑하던 너는 누구인가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허수경 詩集『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
Sliding doors. 언제나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눈을 들어 확인하게 되는 그런 기다림이 있다. 인간의 시간이 원형으로 맴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오로지 한가지 생존의 목적으로 나아가는 生의 직진성, 멈추지 않는 生의 순간, 나의 직선이 그대의 직선과 조우하는 단 한 번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적이 있다.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어둠과 고요를 갈라 놓으며 한뼘으로 닿지 않는 시간을 내 기억에 새기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숙대입구역 2번 출구 앞 한글이름으로 되어있던 카페 앞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던 그 사람이였고, 첫눈이 오던 종로서적 횡단보도 건너에서 사람들 사이 빼꼼히 하늘을 올려보던 검은 외투이기도 했고, 남대문 시장 환한 거리 좌판에 잔뜩 쌓인 옷더미를 고르는 희고 가냘픈 손이기도 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려면 여섯번의 우연이 있어야한다고 했다. 그대를 모눈종이 마다 넣어 놓고 연필로 단단히 가둔다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별은 만년의 기억, 그렇게 내 기억의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대를 불현듯 기억한다. 그대는 세상의 눈이었고 꽃이었고 바람이었다. 그렇게 세상의 당신이, 또 다른 의미의 세상이 될 때 삶이 수렴하는 지점에서 그 직선이 목탄를 든 화가의 손길처럼 내 生이 단 한 번이라도 부드럽게 휘어져 마지막 또 다른 마주침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