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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쿠키 Apr 28. 2022

자, 결혼 열차에 탑승하셨나요?

여보 우리는 지금 어느 정류장을 지나는 중일까?


집에 둘 뿐이던 시절, 우리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새벽녘까지 소소한 야식을 끼고 영화를 봤다. 식구가 셋이 되고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넷인 지금은 아이들 재우고 거실에서 보자는 약속이 민망할 만큼 계절이 다 돌도록 방 밖으로 나오지를 못하고 아침을 지만 말이다.


볼일이 있어 친정에 아이들을 부탁하남편과 둘이서 집에 들어가던 날이 기억난다. 텅 비어 남의 집 인가 싶은 우리 집을 보면서 느꼈던 건 '조용하다. 와 조용하다.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아..'였다. 남편과 잠시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연인에서 애 둘 부부가 된 우리의 공기에는 더 이상 긴장감이 없다. 그때 나는 둘만 남은 공간의 고요가 이토록 편안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우리가 나눈 시간 속에는 그저 아름답고 예쁜 것만 담겨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아이 둘을 낳고 한참 만에 함께 시청했던 것은 영화가 아닌 드라마 '고백 부부'였다. 엄마와 딸, 부모와 자식, 연인과 부부, 그리고 나의 청춘에 대한 회고까지. 시기마저 절묘한 탓일까 울다가 웃다가 아주 인상 깊게 시청했던  띵작이. 드라마 초입은 어린 아기를 둔 젊은 부부의 만만치 않은 현실과 위기의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한 번은 이런 독백의 대사가 흘렀다.

[그 시절 우린 계산하지 않았고, 그저 심장의 반응에 충실했으며 온 우주가 서로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별도 달도 따주고 싶다던 우리의 시간들은 그 마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우린 지금 어디쯤 서있는 것일까..]

당시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공감되는 게 싫어 아닌 척 부정하고 싶은 대사였다. 정말 결혼 직후 우리의 세상은 더 이상 우리 둘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으며, 이제 우리가 이룬 가정이라는 소우주는 약속이라도 한 듯 너무 당연하게 작은 두 생명을 축으로 돌아가고 있었기에  인정 앞에 조용했고 무력했.


부부가 지나는 사랑의 결은 달리는 열차의 정류장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 스스로가 모두 운명 같은 필연의 주인공이 되는 짜릿한 순간이다. 뜨겁고 달콤하고 마냥 지켜주고 싶다는 고백이 절로 나오는 선물 같은 마음. 그렇게 반지 낀 두 손을 꽉 잡고 같은 열차에 탑승하는 남과 여. 하지만 결혼이란 어쩌면 타는 순간부터가 예고된 반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둘이서 탔는데 타고 보니 둘이 아닌 것, 이미 둘과 연결된 많은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 미처 몰랐던 보따리들도 섞여 있다는 것, 알던 것보다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기만 하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포용과 이해를 자신하며 비장한 출발을 한다. 그렇게 설레기도, 낯선 새 학기 같기도 한 신혼이란 사랑 역을 지난다.


두 사람을 닮은 아이가 태어난다. 야속하게도 꼭 그때에 안팎으로 가장 바빠지고 만다. 점점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정신을 못 차리겠고, 어떨 때는 내가 흔들리는 게 기쁨에 취해서인지 날 흔드는 열차가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하니 이것도 큰일이다. 환희 뒤에 감추어진 육아는 출산 넘어 태산이기까지 했다. 

예상 못한 일은 또 일어났다. 함께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랑해'로 연발해대던 우리가, 정작 결혼이라는 거창한 결실을 맺어놓더니 점점 미안하다는 고백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태 그렇게 살아오던 삶이 합쳐졌을 뿐인데..' 그동안 별 문제없던 것들은 서로의 삶에 개입되는 만큼 차곡차곡 미안해졌다. '사랑해 곱빼기'가 될 줄 알았던 자리에 '미안해'라는 불청객이 자리 잡는 아이러니가 결혼이고 육아라니. 어떤 배신감 비슷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나는 어쩌면 결혼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틀 밖에서 모양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아이가 있는 부부가 지나는 정류장은 아마 여기 어디쯤을 쌩쌩 달리는 중이 아닐까. 열차의 속도는 같을 텐데 우리는 이토록 바쁘다. 자리 잡느라고, 키운다고, 잘 살아보겠다고. 책임져보겠다고. 좁아지는 시야에 속지 말아야 할 타이밍이 분명한데 이걸 알아도 그때는 왜 나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마음까지 좁아지는 걸 어쩔 도리가 없었. 도저히 여유가 없어서 각자의 시선에만 갇혀버렸을 때 분명 우리는 가장 위험했던 것 같. 진심이 없는 게 아닌데 그걸 들여다볼 시간적 감정적인 여유가 둘에게 가장 없을 시기라는 사실을 고백 부부라는 드라마를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최선이었고 사랑은 익어갔는데 내 눈앞만 보여서 서로를 못 보는 시기를 우리는 지나고 있었으니까.


당장 한 치 앞의 삶을 장담한다는 것이 얼마나 교만인지 배워가기에 겪어보지 않은 그다음 정류장의 모습이 어떠할지 구체적으로 그려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세월이 조금 더 흘러  잡고 더 많은 역을 함께 거치고 나면 지나온 역들을 돌아보며 미처 놓쳐버린 진심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지점에 서 있지 않을까라고 나는 아직도 내 사랑 방식을 믿는다. 그리고 이미 종착역 가까이 서 있는 선배들이 우리를 바라보듯 청춘과 중년의 어딘가에서 아이 하나씩 안고 허우적대던 젊은 우리를 사무치게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당신을 만난 게 14년, 결혼한 지는 7년이 흘렀어. 사랑에도 모양이 여러 가지라는 걸 당신과 살면서 배우는 것 같아. 나의 짝꿍. 나의 전우. 나의 사랑.. 당신만은 어느 순간에도 한결같아서 이 지독하게 변화무쌍한 결혼 열차의 탈선을 기막히고 안전하게도 막아줘. 어두운 길까지도 빛이 드는 터널로 만들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알아. 턱 밑까지 숨이 차도 당신은 한 번도 최선이 아닌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산다는 게 참 마음대로 안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그런 면에서는 우리가 둘이라 다행이지 뭐야.

잠깐 스치는 눈빛만 보고도 내 오늘 하루가  얼마나 나이스 했는지 아니면 괜찮은 척 애쓰다가 방전된 인간 배터리 같은 하루였는지 알아채 주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전히 당신뿐이야. 그걸 너무 잘 알아서 나는 당신의 실패도 실패라 여길 수가 없어. 누구도 모르는 나의 삽질과 아픔을 본 사람이 당신이어서, 당신이 터널을 지날 때도 얼마든 이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어. 힘들 땐 툴툴대도 그 어느 와중에도 유치한 농담 따먹기를 던지고 받는 우리의 모습은 내게 꼭 맞는 잠옷 같은 위로야.

더군다나 당신은 내가 엄마로 태어나던 날 같은 시간 분, 초에 아빠로 태어난 유일한 쌍둥이잖아. 이런 당신과 내가 어떻게 우연일 수가 있겠어? 처음 사랑에 빠지던 우리와 손잡고 현실을 걷는 우리의 우연과 필연은 그래서 모든 장면에서 유효해. 나한테는 당신이 그래.

사는 건 왜 이리 바쁜지 터널 속의 잔잔한 불빛들은 자꾸만 있는지도 모르게 지나쳐 버리지만 분명히 그 덕에 우리는 계속 걷고 있잖아. 고비가 길어질 때도 터널 끝만 바라보지 말고 오늘이라는 조그만 조명들을 따라서 우리 같이 걸어.

너무 깜깜할 때는 눈앞의 작은 불빛이 소망이고 서로의 서투른 기도가 구원이니까. 내가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 자리했던 십자가를 가장 어두운 밤 시간에 처음 발견한 날의 선명함처럼 말이야. 우리 정말로 그 빛의 힘을 목도했고 덕분에 진짜가 뭔지 깨달았다면 지금이 이미 터널 끝일지도 모를 일이잖아.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유명한 시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당신을 떠올렸어. 이런 커다란 인생 둘이 만난 것도 모자라 두 새싹까지 틔워졌으니, 우리는 아마 앞으로도 꽤나 더 미안할 일도 생기겠지만 사랑하니까 미안한 날도 있는 거고, 사랑하니까 고맙다는 말이 얼마나 따뜻해질 수 있는지를 놓치지 말기로 하자.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미안해와 고마워라는 고백 속에 찐하게 담긴 사랑해를 더 들여다보자고. 그러니까 당신, 아프지도 말고 더 이상 미안해하지도 말기를..


"너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

당신이 결혼 전 언젠가 영화를 보여주며 내게 해주던 말이야. 내가 난쟁이처럼 작아질 때도 나를 사람이라 칭해주는 당신은 내게 여전히 좋은 사람이야.


잃은 게 많은 것 같은 때에도 우리는 그대로였다는 사실을 나도 까먹지 않을게. 서로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로도 우리는 앞으로 지켜낼 수 있는 게 을 거야.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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