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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철 Jan 19. 2022

기다림에 대하여

  

기다림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나 때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말에는 욕망과 인내가 마음 밑부분에 깔려있다. 기다림 없는 하루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베케트의 소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의 삶을 단순한 '기다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 속의 두 주인공은 ‘고도’라는 인물을 50년 동안 기다리며 ‘아무도 오지도, 가지도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정말 끔찍하다.’고 절망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는 일은 때로는 잔인하다.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잠시’라는 애매모호한 시간은 사람을 수렁에 빠뜨린다. 잠시 기다리면 될 일을 그걸 못 참고 포기하거나 낭패를 보면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지 못한 일을 후회한다. 이럴 때 인내심 없는 나를 자책한다. 아니면 잠시라는 두 글자는 기다리고 기다리다 좌절의 이정표를 지나 '분노'에 다다르게 한다. 모두 잠시의 수렁에 빠진 것이다. 기다림에 지쳐버린 이들에게 기다림이 미학으로 가는 길은 숭고함 아니면 자기 최면이라도 있어야 가능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오는 비가 대지의 생명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고 해도 목말라 타들어가 죽어가는 생명에게 잠시 기다림은 가혹하다. 기다림은 누군가에게 잔인하고 가혹하다.  

   

 누군가에게 기다리는 일이 수렁에 빠질 정도로 잔인하고 가혹한 일 만도 아니다. 기다림이 삶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순간이 있다. 애걸복걸하지 않고 내 욕망이 들어오고 나가는 찰나를 알아차리고 잘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여유가 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기다리는 법을 안다. 인도에서 아그라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를 기다릴 때의 일이다. 밤 10시에 출발할 열차는 다음날 새벽 3시에 도착했다. 처음 1시간은 목을 빼고 기찻길만을 바라보았다. 다음 1시간은 플랫폼에 앉아 바닥만을 바라보았다. 다음 1시간은 플랫폼에 드러누웠다. 연착하는 기차를 기다리다 보면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내가 안달복달한다고 기차가 오는 일도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하고 드러눕는다. 인도의 기차역에는 드러누운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기차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냥 누워있다. 기다리지 않으면 마음에 여유가 찾아든다.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지 않으니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기다림을 버리는 일이 잘 기다리는 길이다. 하지만, 아는 만큼 사는 일은 더없이 어렵다.      


 기다림이라는 행위의 대상은 카페의 커피부터 빼앗긴 들의 봄에 이르기까지 제각각이다. 기다리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버스가 오기를 몇 분 기다리기도 하고 북녘 고향 땅에 다시 가보기를 평생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다. 기다림의 대상과 시간은 무수하다.

나는 베란다에 놓인 천리향의 꽃망울이 터지기를 기다리며 매일 바라다보고 있다. 이런 기다림의 시간은 기쁨이다. 그 옆 동백이 담긴 화분은 소담한 동백꽃을 매달고 있다. 이 겨울 꽃을 피워낸 동백에게서 꽃망울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말이면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고 버스 타기를 좋아한다. 요즘은 버스정류장에 버스가 언제 도착하는지 전광판에 보여준다. 기약이 있는 기다림이 주는 편리함으로 버스 기다리는 일은 좀 싱거워졌다. 그렇다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던 시골 버스정류장이 그리운 것은 아니다. 무작정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면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문구보다 언제 올지 기다리는 약간의 긴장이 나을 때가 있다.     

 

잠시라는 시간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기다림의 시간을 인지하는 사람 간의 차이로 종종 갈등을 빚는다. 아내에게 사과 하나 먹을까 했는데 아내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할 때 나는 앞일이 짐작된다. 배달음식을 시켰는데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을 때에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만의 전화를 다시 돌린다. 성격 차이로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기다림을 생각하는 마음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잠시라는 애매모호한 시간의 수렁에 갇혀 기다리는데 취약한지 나를 들여다보았다.      


 ‘고도를 기다리며’ 속의 ‘고도’는 관점을 달리하면 여러 가지로 바꿔볼 수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어쩌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죽음을 기다리며’로 바꿔보았다.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죽음은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와 같다. 2년 전 95세의 아버지는 방안의 의자와 침대를 오가며 고통스러운 몸을 뒤척였다.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죽음을 기다리고 계셨을 테다.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죽음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고도’와 닮았다. 오늘은 오지 않는다는 말에 이렇게 기다리느니 차라리 목을 매겠다고 말하는 소설 속 ‘에스트라공’의 말이 흘려 들리지 않는다. 죽음은 기다리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닥친다. 죽음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있고 죽음을 곧 맞이한다고 생각해 본다. 죽음이 오늘 올지 내일 올지 불안에 떠는 나를 그려본다. 이럴 거면 에스트라공의 말처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편이 낫겠다 싶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다림에 좌절하며 다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불교의 명상법에 죽음 명상법이 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명상을 통해 수련함으로써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혐오와 공포의 인식에서 벗어나 삶의 과정으로 전환하도록 이끈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기다림의 대상에서 마음먹기에 따라 맞이하는 대상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봄을 기다린다’와 ‘봄을 맞이한다’를 입으로 말해보면 차이가 느껴진다. 기다림에는 바라는 마음이 느껴지고 맞이함에는 수용하는 마음이 스며있다. 나에게는 수없이 많은 욕망이 마음에 가득하고 이 욕망 들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언젠가는 이루어진다고 믿도록 스스로를 속이며 사는 삶은 초라하다. 이 기다림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맞이하러 나가는 것이다. 


 봄은 언제고 온다. 봄을 기다린답시고 신발 벗어놓고 먼 산 보는 사람이 있다. 봄을 맞이하는 사람은 신발 고쳐 신고 길로 나선다. 길 위에서 봄을 마주하지 못해도 아직 겨울이면 겨울을 맞이한다. 지금을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내일을 기다리는 지혜가 있다. 아는 만큼 살기가 가장 어렵다. 그렇다 해도 무언가를 기다릴 때마다 지금을 맞이하는 마음을 퍼올려야 한다. 맞이하는 마음의 물을 퍼올려 기다리는 마음의 불을 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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