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이렇게 정의했다. “역사는 我와 非我와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여름의 낮더위가 여전한 늦은 오후 산책길을 나서려던 나는 몇 번을 망설였다. 산책을 나가자는 마음이 에어컨 아래 소파에 드러누운 몸을 일으켜 세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찌해서 밖을 나와 숲길을 조금 걸으며 몸에게 말을 걸었다. “좀 덥기는 해도 걸어보니 괜찮네” 이렇게 마음이 몸과 하나가 되는 순간 나는 작은 평화를 느낀다.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작은 평화인지 모르겠다. 자동반사처럼 발걸음 옮기기를 한 시간을 넘기니 이번에는 몸이 마음을 흔들어댄다. 박완서작가의 말대로 젊었을 때 만만했던 몸은 이제 평생 모시고 살아야 할 상전이 되었고, 요즘은 버릇 나빠진 아이 같기도 하다. 해서 나는 삶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삶은 몸과 마음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요즘의 나의 수면 리듬은 제멋대로이다. 제시간에 자고 잠들면 깨지 않고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아침을 느껴 본지는 언제인지도 기억이 없다. 새벽 2시가 되면 눈이 떠지고 뒤척이다 출근시간이 되어서야 다시 졸음이 몰려오면 아침은 졸음 몰아내기와 사투를 벌인다. 이런 고충을 말하면 커피를 끊어라. 저녁에 술을 마시지 마라. 운동을 해라. 따뜻한 우유를 마셔라. 타트체리가 좋다더라. 갖가지 해결책을 조언해 주는 사람들의 말을 따라 몇 가지 시도를 해보기도 하였다. 지금 이 이야기를 적는 시간도 새벽 세 시이다. 잠을 자고 싶다는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나는 술을 수면제 삼아 마셨다. 처음에는 말 안 듣는 아이 혼을 내듯 술을 마시니 몸이 좀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방법도 잠시 몸은 더 이상 만만히 수긍하지 않았다. 새벽 두 시에 몸과 마음이 사투를 벌인다.
마음이 처음으로 몸에게 진지하게 말을 걸었다. “몸아 그동안 지랄 맞은 마음과 지내느라 고생이 많았다. 몸아 미안하다.” 그런데 그 마음에게도 말해 주고 싶다. “ 마음아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는 몸의 고삐를 잡고 있느라 애쓴다.”
얼마 전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다. “이제는 마음 가는 대로 살려고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분도 나처럼 고민하고 있구나. 그 고민은 나만의 것이 아니구나. 그럼 에도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일은 현재 진행형과 목표 지향형의 그 어느 중간쯤에 머무는 것 같다.
“단순하게 생각해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라는 말을 들을 때는 단순과 복잡 사이에서 또 얼마나 애를 쓸까를 느낀다. 마음이 원한다고 모두가 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살 수 없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한없이 나약하다. 한없이 나약한 몸이 수시로 마음을 시험에 들게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만 생각하고 몸을 돌아보지 못했던 지난날을 돌아본다. “마음아! 네 마음 챙기느라 몸이 고생이다.”
오늘은 삶을 이렇게 정의한다. “삶은 몸과 마음 서로의 연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