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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철 Aug 29. 2023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죽음을 말하는 일은 메마른 입으로 베어 물은 크로와상 같다. 바짝 마른입 천정에 수천 겹의 빵조각 들이 들러붙어 말이 나오지도 침이 삼켜지지도 않는다. 엄마의 죽음을 보는 일은 차디찬 얼음장에 맨몸으로 눕는 일이다. 차가움의 칼 끝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도 꼼짝할 수 없이 느끼고 있어야 만 할 것 같다. 엄마의 죽음을 떠올리는 일은 입이 마르고 살 속으로 칼들이 들어오는 것처럼 아프다.

      

 4년 전인 2019년 겨울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는 슬픔에 빠진 자식들을 토닥이시듯 편안하고 깨끗한 얼굴로 눈을 감으셨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보내는 순간순간에도 아버지가 안 계신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가두고 계신 방죽이었다. 방죽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대신할 자식은 아무리 보아도 없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어머니는 좀 특별난 분이었다. 말은 특별하다고 하지만 가슴은 이름만 불러도 고통이 느껴졌다. 엄마라는 이름이 얼마나 좋은데 엄마를 떠올리는 일이 고통스럽다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집에 남겨진 어머니는 홀로 지내는 시간을 두려워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상실감과 홀로 남겨진 듯한 불안이 어머니를 잠시 흔들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죽방이 무너지고 쏟아져 나온 지난 세월의 온갖 기억들이 어머니를 진창에 빠뜨리고 고통의 뻘 속에 집어넣었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셨다.     


 고통 속에 신음하는 어머니의 넋두리는 며칠을 계속하시더니 몇 달 이어졌고 이윽고 해를 넘겼다. 자식들은 순번을 정해 교대로 어머니의 넋두리를 들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 봄날 섬진강을 따라 피어난 꽃 대궐을 바라보면서도 어머니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더욱 분하고 가슴 아픈 듯 지난날의 고통을 쏟아내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고통에 같이 울고 같이 슬퍼하며 위로하던 자식들은 어느 순간 라디오의 테이프를 틀어놓은 듯 한 어머니의 넋두리에 정신이 어떻게 될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치매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집에서 어머니를 모신 지 3년 8개월 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뜨셨다. 세상을 뜨시기까지 4명의 누나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 곁을 지켰다. 도중에 숱한 갈등이 생겼다. 누나들은 어머니를 더 모시다가는 내가 먼저 정신병원에 들어갈 것 같다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아들인 나는 고통의 늪에 갇힌 어머니에 대한 연민보다 어머니의 입을 좀 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맞았다.   

    

 어머니에게서 변화가 느껴졌다. 거의 반강제로 데이케어센터에 모시고 다닌 이후로 어머니에게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집에 같이 있는 것을 매우 불편해했다. 집에 자식들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드나드는 일을 견디지 못해 요양보호사를 쓰는 일도 마땅치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데이케어센터에서 낮 시간을 보내신 이후로 누나들은 낮 시간을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도 조금씩 활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대로만 지낼 수 있으면 어머니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는 누나들은 효녀들이었다.      

 어머니에게 자식은 기쁨보다 고통과 조건화가 되어 있었다. 자식은 존재의 기쁨보다도 많은 자식을 길러내야 한다는 책임이었다. 매일 되풀이되는 일을 쉼 없이 해내어야만 가족들을 보살필 수 있었다. 지독히도 깔끔하고 부지런한 어머니 밑에서 자식들은 깨끗한 옷과 신발을 입고 신고 학교에 다녔다. 정작 자신은 몸이 지치고 아파도 열이나 되는 식구들 끼니를 차리는데 손을 빌릴 곳이 없었다. 어머니는 잘 차려 입힌 자식에게서 즐거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부엌으로 달려가 도시락을 쌌다. 어머니에게 자식을 보는 일은 책임과 고통을 떠올리는 두레박질이었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고통의 우물이 바닥을 보이는 날이 간혹 있었다. 그런 날은 누나들과 어머니는 웃고 떠들고 춤추고 노래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유머가 많으신 분이었다. 자식들을 두고 던지시는 농담은 집안을 초토화시켰다. 혼자 힘으로 열 식구를 먹이고 입힌 힘이 자식들을 호령하는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어머니는 데이케어센터에서 불의의 사고로 고관절이 골절되었다. 그 뒤로 3개월 만에 세상을 뜨셨다. 34년생인 어머니는 향년 90세로 집에서 일생을 마감하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집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누나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는 음식을 넘기지 못하셨다. 누나들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힘들어했다. 어머니는 배고픔을 끝없이 호소했지만 미음도 못 넘기시지 못해 괴로워했다. 자식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극도로 불안해해서 누나들을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곁에 있도록 붙잡고 있었다.  

    

 어머니를 뵈러 이번 주말에 서울에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목요일 아침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울먹이는 누나가 상황을 다 말해주고 있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고통부터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엄마의 고통 속에서 같이 고통스러워하던 누나들은 지금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고 한다. 큰 누나는 부모님의 심성을 닮아서 착한 마음으로 엄마 잘 보살펴 드린 동생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작은 누나는 엄마가 아직도 집에 계신 것 같고 우리에게 평안함을 주고 가신 것 같아 감사하고 입관식 때 엄마의 예쁜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막내누나는 모두들 남들은 상상도 못 할 맘의 고통을 참아내고 엄마를 보내드렸으니 이젠 모두 다 털어내고 행복하자고 내게 문자를 보냈다. 내 인생을 통째로 관통하는 화두는 엄마의 고통이었다. 이제는 엄마의 죽음과 함께 그 고통도 사라졌다. 이제는 모든 고통이 없는 곳에서 오늘 밤은 편히 잠드시길 기도한다. 엄마의 죽음을 앞에 두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고통 없는 곳에서 편안히 쉬시는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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