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말이나 사건 한 두 개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냥 지나치고 지날 수도 있었을 말이 세월이 지나도 귀에 맴도는 말이 나에게도 있다. 그러한 말은 어느 특정한 사건과 연결되면 나에게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 가끔 먼 옛일을 떠올리면 그날에 일어났던 일과 말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지금부터 15년 전에 작다고만 할 수 없는 건설회사에 입사를 했다. 아파트를 10만 세대를 지은 공기업이었으나 사기업에서 인수해서 내가 입사할 때는 그 옛날의 명성은 거의 사라지고 자산만 남아 있는 회사였다. 내가 이 회사에 들어가게 된 경위는 나 홀로만 심각해질 뿐이니 밝히지 않겠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나누는 대화가 앞으로 펼쳐질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적어놓고 두고두고 보려는 마음이다.
이 공기업을 인수 합병한 회사는 인수할 때부터 공기업의 잠재적 성장가치가 아니라 보유한 자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회사는 경영이 악화되었고 내가 입사한 지 3년 정도가 지났을 때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졌다. 그 당시 나는 한 임원 분을 모시고 회사의 악성 채무와 온갖 소송을 담당하고 있었다. 업무가 업무이다 보니 조폭이나 양아치 같은 시행업체 사장과 공사대금을 두고 공방을 하거나 소송에 필요한 준비서류를 챙기며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모시던 상사들이 손을 놓고 다른 곳으로 옮겨도 이 일에 전후를 알고 있는 나만은 이 업무를 계속했고 회사도 내가 늦은 나이에 어디 갈 데가 없다는 것을 파악했는지 쓰레기 같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 책상에 던져 놓았다. 어느 날 또 다른 임원이 오셨다. 이번이 내가 모시게 되는 세 번째 임원이었다. 큰 키에 약간 마른 듯하고 타이핑하는 손가락이 기다란 그분은 임원실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도 나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분은 인천에 있는 계열사 대표를 지냈는데 갑자기 왜 이 일을 맡게 되었는지 직원들은 영문을 알지 못했다. 이번 인사이동을 두고 회사 내에서는 그분이 곧 정리대상이 될 것이라는 소문만 나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늘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일 나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치울 게 없을 것 같이 책상 위에는 노트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업무보고를 위해 그분 방에 들어갔을 때 썰렁함이 소름 돋게 감돌고 있었다. 책상 위에 미동도 없이 노트북 위에 손가락만 움직이는 모습이 방 안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했다.
송사에 휘말리지 말라는 옛말이 틀린 것이 없다. 이번 송사에 바뀐 임원이 세 번째인데 그때마다 소송사건에 대해 보고하는 일이 너무나 힘이 들었다. 사건의 발단부터 전개를 반복해서 보고하다 보니 나도 어느새 반절은 변호사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오신 이사님은 그전 임원들과는 조금 달랐다. 무심히 듣는 것 같았지만 사건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고 내 의견을 구했다. 그전 임원들은 변호사에게 자료를 정리해서 넘기는 단순 업무만을 지시했었는데 새로 오신 이사님은 내 보고를 다 듣고 내게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일 년 넘게 같은 사건으로 수없이 상대방과 협상하고 소송을 진행해 왔으니 내게도 이 엉킨 일을 해결할 생각이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내게 말할 기회를 주니 그동안 이 사건을 보는 내 생각을 쏟아내었다. 그때 이사님이 말했다. “정 과장, 어디 가서 차나 한 잔 할까?” 그리고, 우리는 그날 수목원의 숲길을 걸었다. 일과 시간에 숲에서 차 한 잔을 마시다 보니 그동안 답답하던 가슴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날 이후 그 소송사건은 티브이 속의 드라마처럼 보였다.
회사의 구조조정 안이 나왔다. 임원을 제외한 전원 사직서를 제출하고 회사가 판단해서 사직서를 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회사를 위해 그동안 밤낮없이 매달리며 일해 온 내가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그날 이사님이 나를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내 직함대신 이름을 불렀다. “칠수야. 앞으로 회사생활 하는데 성과를 내는 일이 생길 것이다. 네 앞에 있는 사과를 절대 네 손으로 먹지 마라. 그 사과에는 시기와 질투라는 독이 있다. 그 사과를 그냥 보기만 해라. 그러면 어느새 독이 다 빠지고 네 손에 있을 것이다.”
이사님은 구조조정 안이 나온 그날 회사에 직원들 몇 명을 더 살려달라는 뜻을 밝히고 사표를 제출했다.
이사님은 퇴직하고 건설회사의 경험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고 지금은 큰 성공을 거두셨다. 구조조정을 마무리한 회사는 직원들의 노력으로 흑자회사가 되었으나 회사가 성장할 즈음에 나는 사표를 냈다. 사과의 독이 빠지고 내 손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기도 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왜 그만두었는지는 이 역시 나만 심각할 뿐이니 밝히지 않겠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사님을 선배님이라고 호칭한다.
정월대보름 우리 부부는 선배님 집에 초대되어 저녁식사를 했다. 그날 형수님에게서 엉겅퀴가 그려진 찻잔을 선물로 받았다. 2017년 유럽과 인도를 여행하고 독립 출판했던 여행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엉겅퀴는 상처의 피를 멎게 하는 효능이 있다. 온통 가시를 두르고 있어도 상처를 낫게 하는 약초이다. 여행은 엉겅퀴와 닮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수없이 깨지고 절망이 엄습할 때 여행은 나를 토닥이고 다시 시작해 보라고 속삭였다. 지금 선배님 부부는 세상의 곳곳을 여행하며 멋진 인생을 살고 계신다. 형수님은 내 책의 엉겅퀴의 구절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사업에 역경 없는 성공은 없다. 아마 선배님 부부도 수많은 고뇌의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 성공의 대가처럼 따라오는 상처들은 여행을 통해 위로받고 치유된다.
엉겅퀴 꽃 잔에 홍차를 따르고 입에 가져다 대었다. 향긋한 꽃향기가 코에 닿았다. 선배님과의 첫 대면부터 시작된 대화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대화는 늘 새로운 시각과 도전에 관한 대화이었고 세상을 통찰할 길을 열어주었다. 내 삶의 조그마한 성공의 시작은 선배님과의 대화이었다. “칠수야, 살다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성과를 내면 창 밖을 내다봐라” 실패는 남 탓하지 말고 성공에는 겸손하라는 말은 내 사회생활에 지침이 되었다. 인간에게는 세 개의 간이 있다고 한다. 시간, 공간, 인간이다. 시간은 자연의 섭리이기에 인간이 관여할 수 없고 공간과 인간은 나의 선택으로 바뀌기도 한다. 공간과 인간의 힘은 한 사람의 습관을 바꾸고 운명에 관여한다. 이 엉겅퀴 꽃 잔을 들고 지난 십 년을 돌아보니 앞길이 어둡고 막막할 때 선배님과의 대화의 주제는 늘 새로운 희망이었다. 좋은 사람 좋은 인연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