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 재촉하는 아침
버스 정류장의 분주함 속에
의자에 가로누운 노파는 미동이 없다.
회색 의자보다 짙은 무채색 옷차림에
전 재산 단출한 가방 하나를
베개 삼아 단잠을 잔다.
갈길 없는 방랑자,
잠에서 깰 이유도 없는 걸까.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건지 모두가
무심하게 떨어져 각자의 버스를 기다리는데
갈길 가던 누군가 노파의 머리맡에
살포시 빨간 사과를 하나 올려놓았더라.
그 빨간빛이 너무나 따사로워
출근길 내내 마음이 눈부시다
누구였을까?
사과 대신 마음을 놓고 간 사람.
누가 이렇게 따뜻했던 걸까.
2021년 어느 날.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회사를 가기 싫다가 아닌 그만두고 싶다는 강한 욕구에 절어 있던 시절.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이 없이 부지런히 출근 준비를 하고 버스에 앉아 회사로 향하고 있었다.
그나마 축 처져 있던 나에게 운이 좋았던 건 버스 출구 바로 뒤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정도였다.
보통 아침에는 어둠 속에서 빽빽하게 자라나는 콩나물과 같이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 한 뼘을 공유하며 버스에 끼여서 출근을 하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날은 운이 좋게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침 출근길의 사람들은 정말 무표정하다. 물론 나도 저런 표정이거나, 혹은 내가 지쳐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서대문 경찰서를 지나고 있었다.
이내 곧 버스가 멈춰서고 버스를 내리고 타는 인파 속에서 정류장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다소 어색하게 버스정류장 중심을 비워둔 채 둘러싸고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으 나는 그 모습이 어색하게 다가섰던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바쁜 아침 출근길 버스 정류장 벤치에 노파 노숙자 한분이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른 노숙자들이 그렇듯 그분도 한껏 회색인지 갈색인지 알 수 없는 옷을 입고 있었고, 아마도 본인의 전 재산으로 보이는 커다란 배낭을 머리에 배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나는 한 껏 삐뚤어진 마음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다 같이 힘들게 사는 세상 왜 피해를 주며 살아가는 걸까. 왜 저 수많은 선량한 (아닐 수도 있지만) 시민들이 아침부터 불편함을 겪어야 하는가?
이런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무언가 강력한 빨간 물질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노파의 머리맡에 빨간 사과를 올려놓았는데 그제야 그것이 보인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출근길 복장과 그보다 차가운 얼굴들, 노파의 짙은 회색 복장과 대조를 이루며 안 그래도 빨간 사과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 색을 자랑했다.
나는 심지어 저 버스정류장에 있지도 않아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도 없으면서 이렇게 불만 가득한데..
누군가는 저 이를 위해 빨간 사과를 내려놓았구나.라는 생각에 미치자 갑자기 마음이 따뜻하게 무거워졌다.
부끄러워서였을까?
마음이 유난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 흑백 속에 유난히 빨갛게 느껴졌던 그 사과.
그만큼 세상은 아직 정이 살아있고 살아갈 만한 곳이라는 생각에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 이후로 잠에서 깬 방랑자가 그 사과를 맛있게 먹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따뜻함을 느꼈지는 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날 그 사과를 바라보며
지쳐 있는 마음에 순간적인 구원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감사하다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