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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곰 Jun 08. 2023

03. 눈을감고 여름 나무를 그리다

지난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 가지에
어느덧 푸른 녹음이 우러러 보이고

짙은 녹색 내음을 한가득 맡아보면
만물의 생명력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조용히 마음 가득 여름을 맞이하며
낯선 뜨거운 온기에 오감이 노곤한데

그럴수록 나뭇잎 무심하게 듬성한
앙상한 나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누구보다 커다란 잎새를 만개하여
그 위세를 자랑하던 아름드리 큰 나무

지난겨울을 여전히 홀로 지키고 있는
유난히도 봄이 오지 않는 나무

다시는 잎을 피우지 못해도 괜찮다
눈을 감으면 떠올려지는 밤하늘의 별처럼
아로새긴 추억들이 높은 가지에 걸려 있기에




사람은 들고 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배운 것 중에 하나는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불혹을 넘겨 살면서 다양한 순간을 맞이하다 보면, 내가 힘든 순간 부르지 않았는데 어느덧 삶의 한편을 든든하게 잡아주는 이가 등장하기도 하고..

우리의 우정 견고하다 생각했는데 나의 믿음 따위는 아주 우습게 보고 멀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순간들도 종종 있다.

힘든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도 없는 순간.

주변에 사람들이 차고 넘쳐 가득 풍요로웠던 시간.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아주 찰나와 같이 지나갔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는 누군가의 등에 기대거나,

때론 내 등을 밀어주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살아왔다.


그들과 웃고 떠들며 삶의 따뜻함에 고마웠고, 그들의 충고와 위로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나의 감사함을 조금씩 얹으며 살아왔다.


이제는 찾기 어려운 은행의 복리 이자처럼-

시간이 지나면 함께하는 따뜻한 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런 우정이 있음에 감사하였다.


전 세계가 고금리에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는 지금, 이제는 그런 것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오히려 은행에 예금하면 돈을 관리해 주는 대가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스위스 은행 같은 우정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 관계를 유지하시려면, 해마다 일정량 어느 정도 이상 노력은 하셔야 합니다.’

우정 관리인의 주판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한 겨울의 나무들을 보면 정말 모든 게 메말라 이미 죽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뾰족한 나뭇가지 끝에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붙이면 생명의 숨길이 전혀 느끼 지지 않을 때가 있다.


종종 그러한 나무들을 보며 한때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서 끈적한 관계를 맺은 인연이었는데, 이제는 멀어져 버린 몇몇의 얼굴을 떠올리곤 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이민을 가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서, 성격이 안 맞아서 등등


때로는 아무렇지 않게, 간혹 격하게 아픔을 주며 나를 떠나고 내가 떠나갔던 그 인연들.


그러한 죽은 관계가 저 앙상항 겨울나무와 닮았다고 느껴졌다. 겨울나무가 여름에는 푸른 잎으로 풍성했던 것과 같이, 우리 관계도 풍요로운 시절이 있었다.


그 짙은 녹색 풀냄새의 향과 같이 인간미 넘치는 사람냄새가 너무나도 짙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이 너무 그리울 때도 있다.


완전히 고사한 것 같이 앙상한 저 나무도 다시금 날씨가 따뜻해지고 비가 오면 거짓말처럼 잎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나간 인연들은 나무가 아니다.


한번 뚫어진 하늘의 구멍을 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다시금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을 한가득 선물한 우리의 인연들은 이미 그것으로 제 값을 충분히 해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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