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네요. 마음지기님께서 적극적으로 잘 따라와 주셔서 마음의 응어리가 해소되는 계기가 되었나 봐요. 오늘은 전에 말씀하셨던 따돌림 당하셨던 기억으로 돌아가볼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네"
"눈을 감고 편안하게 숨을 쉬시면서 가장 안전한 공간에 있다고......."
안내해 주시는 목소리를 따라 그 시절선명한 아픈 기억으로 빨려 들어간다.
6학년 여자화장실 한 구석에 날 몰아세우고 둘러싼 친구들.
그들은돌아가며 쌍욕으로 날 모욕하고 난 당황한 채 벽에 몰려 서있다.
비수처럼 심장에 꽂히는 욕설과 조롱들.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감정에 눈물이 쏟아진다.
이어 억울함에 마음이 답답해져 호흡이 곤란해진 난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다가 목놓아 울어버렸다.
상담사님은 내가 그 시절 내가 항변을 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욕설조차 못하자 성인이 된 지금의 내가 가서 나를 달래주고 공격하는 친구들을 대신 혼내주라고 하셨다.
아... 정말이지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입술 밖으로 안 나온다.
"못하겠어요 선생님. 저 못하겠어요."
곧 다시 현실로 돌아왔지만 끓어 넘친 설움은 오열이 되었다.
그날은 담임선생님이 교통사고로 입원하신 날이었다.
늘 같던 평소와 다른 건 선생님이 교실에 없다는 사실 하나.
옆 반 선생님이 자습을 시켰고 늘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가 내 성을 붙여 부르더니 당장 화장실로 따라오란다.
영문을 알 리 없는 나는 그저 따라갔을 뿐.
화장실엔 반 여자애 8명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 역시 평소 점심도 같이 먹고 쉬는 시간에도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었다.
"야 마음지기 네가 뭔데 맨날 잘난 척이냐 재수 없게"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미친 x이 x라 짜증 나"
한 마디씩 돌아가며 던지던 그들은 감정이 고조되자 욕설을 더욱 하며 공격의 강도를 높인다.
그러던 중 쉬는 시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린다.
"야! 너 학교 끝나고 화장실로 와" 으름장을 놓고 흩어진다.
학교가 끝나고 서둘러 집으로 가는데 세 명이 따라온다.
그날 아침 비가 내렸고 모두의 손에는 우산이 있었다.
어딜 도망가냐며 당장 이리 오라고 욕을 하며 악귀같이 따라붙는 애들을 피해 서둘러 집으로 뛰어가는데 이젠 우산으로 내 가방을 찌르고 때리며 쫓아온다.
전속력으로 달려 아파트 앞에 도착한 나는 목청껏 엄마를 불러댔다.
때마침 앞베란다에서 빨래 중이던 엄마가 바깥을 내다보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애들이 우산으로 나를 때리며 따라온다고 외쳤다.
너 내일 두고 보자며 도망치는 친구들을 두고 집으로 뛰어가서 억울함에 그날 당한 일을 낱낱이 고했다.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며 네가 뭘 잘못했으니 걔들이 그러겠지 왜 이유 없이 그러겠냐며 시끄러우니까 울지 말라고 나를 혼낸다.
아, 그때 내가 느낀 그 억울함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난 세상이 빙빙 돌며 어지러웠고 숨이 안 쉬어질 만큼 억울했으나 그보다 더 무서운 엄마때문에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그 감정은언제 어디서든 이 기억을 들출 때면 똑같이 재생된다.
퇴근 후 아빠에게 이사실이 전달되었고 그 당시 경찰관으로 재직 중이시던 아빠는 이 사안이 그냥 넘어가선 안된다고 생각하시고 담임선생님께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엄마는 그 아이들 부모에게 전화로 항의했고, 대부분 부모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주동자의 엄마는 자기 딸이 그랬을 리가 없다며(그렇게 얘기하는 부모들은 하나같이 어쩜 자기 자식을 하나도 모르는지, 매뉴얼이라도 있는 듯 같은 반응을 보인다) 딸에게 확인해 보고 필요하다면 사과를 시키겠다는 뻔뻔한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공포를 억누른 채 학교에 갔다.
전날과 같이 자습시간이 주어졌고, 주동자는 쉬는 시간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내 앞으로 와서 큰소리를 쳤다.
"야 마음지기, 우리 엄마가 나한테 사과하라고 시켜서 사과는 하는데 내가 진짜 미안해서 너한테 하는 사과가 아니거든?"이라고 내뱉은 채 이내 자리를 떠난다.
그렇게 극외향이던 나는 학교에 가기 싫어 공포에 떠는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1교시 후 날 따돌리던 애들 사이에 수군거림이 퍼졌고 이내 그들은 줄 서서 편지를 써오더니 사과를 전한다.
"마음지기야, 정말로 미안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 근데 H가 자기편을 들지 않으면 나도 같이 놀지 않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어. 우리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자."
그 편지와 사과를 받은 그 시절의 나는, 그들에게 사과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목에 고정지지대를 하고 나타난 담임선생님이 그 친구들의 행동변화 이유를 짐작케 한다.
나는 선생님이 유독 예뻐했다는 이유로 그런 따돌림을 받았지만, 그 누구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얘기해 주며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내 잘못인 줄만 알고 지금껏 그렇게 살아남았다.
다시 만날 일 없을 줄 알았던 그 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다.
별문제 없이 1년을 버텼으나, 나에게는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었다.
더 이상 괴롭히지 않던 그 친구를 보며 자꾸만 그 시절 아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리고 그 상처가 나의 감정과 함께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왕따이야기를 부끄럽게 생각했고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렇게 낱낱이 드러낸 것은 처음이어서 내 온몸에 수분이 눈물과 콧물이 되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상담사선생님은 부드럽게 나를 위로했다.
"그게 왜 마음지기님 잘못이에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어린 시절 받았어야 할 위로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이렇게 상처가 크게 곪아버린 거예요. 그때 제대로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으니 이제 잘 치료해 줘야죠. 그 친구들이 나쁜 거예요. 그때 그 애들에게 욕이라도 실컷 해주세요."
욕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무기력한 감정상태였던 나에게 욕을 선창 하시며 따라 하게 하셨다.
그리고 내 잘못이 아니란 걸 깨달을 즈음, 앓던 이가 빠진 듯 마음 깊은 곳이 후련했다.
아픔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
제대로 된 위로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만큼 성장하고 따뜻한 사람이 된다는 것.
사족이지만, H에게.
그때 네 잘못이 컸다는 걸 지금은 깨달았을까?
한 때 네가 잘 된다면 정의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넌 누군가에게 그렇게 폭력적이었던 기억을 안고 살아야 할 테니 그것도 쉽진 않을 거라 믿어.
그때 네가 한 사과 같지 않던 그 사과, 내가 받지 않았는데 혹시 알고 있니?
사과하지 않았어도 그 일은 용서해 줄게.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은 너에게 나의 에너지를 쏟을 여유가 없거든.
난 너를 보며 네가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너를 키운 네 부모님 잘못이 컸다는 게 내가 부모가 되니 보이더라.
너는 부디 너의 아이에게 그보다 더 나은 부모가 되어주길 바랄게.
넌 충분히 귀엽고 공부 잘하는 아이였는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자격지심으로 괴로워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네가 어디서든 잘 지내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