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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호사 J Dec 06. 2022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 배너지, 뒤플로

경제학자 부부가 힘든 시대에 전하는 따스한 충고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은 2019년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배너지&뒤플로 부부가 저술한 책이다. 저자들은 일반적인 경제학 대중서와 다르게 경제이론의 단순한 설명을 떠나, 현실에서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이슈들에 관하여 풍부한 사례를 들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이 책을 썼다.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만이 아니라 잘되어 온 것은 무엇인지도 짚어보고 싶었다. '문제'만 논하는 책이 아니라,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직시한다면 갈갈이 찢긴 세상을 다시 온전하게 만들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도 말해주는 책이길 바랐다. 어디에서 경제정책이 실패했는지, 어디에서 이데올로기가 우리 눈을 가리고 있었는지, 어디에서 우리가 명백한 것들을 놓쳤는지 지적하되, '좋은 경제학'이 (특히 오늘날 같은 시기에) 왜, 어떻게 유용할 수 있는지도 보여 주는 책이었으면 싶었다.


맹신과 혐오가 영혼을 침식하는 힘든 시대에서, 이 책은 경제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에 대하여 경제학자로서의 쉽지 않은 소신을 밝히고 있다. 거침없이 전해지는 차가운 언어는 시대와 인류에 대한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다.




1. 귀납과 연역


이 책에서 귀납이나 연역과 같은 논증 용어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정적인 예측이나 어설픈 논리적 연역을 경계하고, 언제나 실증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끊임없이 귀납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복잡한 논증에 대한 인내심을 점점 더 잃어가고, 이로 인해 전문가도 치밀하고 입체적인 분석보다는 평면적 이해와 단순한 직관으로 기우는 세태임이 지적된다.


그러나 경제학의 모든 이야기는 현실에 발 딛고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이하의 내용 또한 비현실적인 가정하에 수립된 기존의 경제적 통념을 산산히 부수고 있다. 


사회과학은 수학이 아니므로 이론에는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말하는 것은 쉽지만 증명하는 것은 어렵다. 위험한 것은 틀린 것이 아닌 과도한 자기확신과 아집이다. 


우리는 '단언'하는 경제학은 좋은 경제학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세상은 매우 복잡하고 불확실한 곳이어서, 많은 경우 경제학자가 대중과 소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그의 결론 자체가 아니라 그 결론까지 도달하기 위해 밟은 경로다. 그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는 어떤 것인가? 그 데이터를 해석하는 데 사용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거 선택한 논증 절차는 무엇이며 그의 논증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불확실성의 요소들은 무엇인가?


2. 시장경제의 경직성


고전경제학이나 그것을 통해 법칙화된 몇몇 이론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경제전문가들은 시장경제의 플레이어가 늘 최적의 선택을 함으로써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관련하여 저자들은 초반부터 이주나 무역에 관한 온갖 실증연구결과를 설명하며, 그러한 경제이론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컨대 경제적 이득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쉽게 국가를 넘어 이주를 하거나 직업을 바꾸지 않는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인생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이 경제적 이득만을 근거로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을 조금 더 벌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고향, 친구, 이웃을 쉽게 버리지 않는다.


이론적 경제학에서 배제된 경직성이라는 현실적 특성은 불평등을 심화하는 요인으로 연결된다. 경직성으로 인한 피해는 선택지가 많지 않은 계층에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정책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경직성을 해소하고, 경제의 변화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피해자들의 삶에 착안하여 실행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이주 자체는 지역이나 국가간 삶의 수준을 균등화하고 경제적 충격을 흡수하고 구조적 전환에 적응할 수 있는 중요한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이주의 경직성을 해소하기 위하여 오히려 적극적 이주장려정책이 실시되어야 한다. 또한 무역으로 쇠락한 산업에 대해서도 필요하다면 임금보조정책을 통해 충격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다만 쇠락산업의 정책적 보조에 대한 저자들의 의견은 반박의 여지도 있어보인다.


핵심은, 변화해야만 하는 것, 이동해야만 하는 것, 좋은 삶과 좋은 일자리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버려야만 하는 것이 일으키는 고통에 눈감지 말고 그것을 더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3. 경제성장과 불평등


개도국의 경우 자본시장과 노동시장에서 자원배분 효율성을 개선하는 것만으로 어느정도의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해당 시장의 배분기능 자체가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일본과 21세게의 중국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위 외 근본적인 성장동력과 관련하여,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이에 대한 연구를 했지만, 가장 뛰어난 학자들조차 성장의 원인을 추동하는 요인- 즉, 총요소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요인- 을 속시원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2006년 세계은행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포함된 수십명의 연구인력, 수백명의 전문가, 수백만 달러의 예산을 들어 경제성장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지만, 연구의 결론은 결국 '우리도 성장의 원인을 모른다'였다. 실제로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개선하여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 낸 중국은, 그 이후 정책의 갈피를 잡지 못하며 성장률의 둔화를 막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빈약한 논거를 바탕으로 성장에만 집착하는 정책, 막연히 낙수효과를 이야기하며 가난한 자들을 희생하는 정책이 재앙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이 미국과 영국의 역사에서 확인되었다. 전후 찬란한 성장기를 구가하던 미국과 영국은 1980년 이후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당시 이러한 문제의 원인으로 케인즈주의를 바탕으로 한 좌파적 정책이 지목되었고, 레이건과 대처가 집권하며 레이거노믹스, 대처리즘으로 불리우는 대규모 감세정책이 실행되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것처럼 성장률은 회복되지 못하였고 도리어 불평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감세정책이 경제성장과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았고 불평등을 촉진하였다는 여러 실증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렇지만 그 인과는 경제학계에서 여전히 팽팽히 맞선 논쟁이 이루어지는 논점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한편 국가의 정책과는 별개로 중국과 인도의 개방을 필두로 한 세계화, IT산업의 부상과 승자독식기업(플랫폼기업)의 출현, 시장의 경직성으로 인한 기업 간 위계의 발생도 불평등을 추동하는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수세대에 걸쳐 경제학자들이 매우 진지하게 노 력을 기울였음에도 경제성장의 근본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는 것이다. 누구도 부유한 나라에서 성장이 다시 시작될지, 그 가능성을 높이려면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한다. 좋은 소식은 그것을 알게 되는 게 언제이든 간에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간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 모두 자국 경제 내에서 명백한 낭비요인들을 없앨 수 있다. 이것으로 영속적인 고도성장에 불을 당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사람들의 후생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가 성장의 기관차가 다시 달리게 될지, 언제 그렇게 될지는 알지 못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더 건강해지고, 읽고 쓸 수 있게 되고, 당장의 절박한 처지를 넘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면 성장의 기차에 올라탈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은 알고 있다.


4. 부족화, 그리고 혐오


저자들은 극단적 불평등은 사회균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절대적 박탈감보다 상대적 박탈감이 사람들의 정신을 더욱 움츠러드게 만든다. 실제로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사람일수록 과시적 소비가 줄어든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즉, 인간에게는 취약해진 자존감을 쓸모없는 사치재로 채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며, 이는 사실 연구결과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직관이기도 하다. 


이처럼 박탈감을 느끼는 집단에게 자신을 이러한 처지로 내몰았다고 생각하는 타 집단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집적되었고, 아웃라이어들이 과대대표되며 부족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SNS는 반향실의 역할을 하며 이러한 경향성을 강화한다.


이러한 집단간 혐오와 관련하여 일차적으로 거론되는 익숙한 해결책은 차별금지나 혐오표현금지를 위한 제도의 제정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저자들은 부족화 현상을 타개하기 위하여 먼저 가해자 집단에 초점을 맞춘다.


편견에 기반한 선호가 표출되는 것은 질병의 원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증상이기도 하다. 오히려 원인보다 증상에 더 가까울 것이다. 때로 편견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경제적 고통에 대한, 우리가 더 이상 조중받지 못하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 데 대한 방어적인 반응이다.


오늘날 타 집단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는 사회적으로 가장 존중받지 못하는 집단에서 가장 강하게 발현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파괴된 자존감을 회복하는 손쉬운 방법은 타자들의 편견을 바탕으로 대상집단을 단순한 요소로 환원해 인식함으로써 그들을 우리와 분리하고 격하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리는 편견과 혐오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결국 이것은 감정과 자존감의 문제이기 때문이고, 그들에게는 결국 불평등으로 인하여 파괴된 자존감을 회복시킬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5. 존엄성의 회복


바야흐로 박탈감과 분노를 잠재우고, 존엄성을 회복시킬 대안에 관한 공공담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의 존엄, 존중받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새로운 사회프로그램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경제학 서적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존엄’이라는 것은 새겨볼만한 지점인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같은 변화와 불안의 시기에, 사회 정책의 목적은 충격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폄하하게 되지 않으면서 충격을 흡수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불행히도, 현재의 시스템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사회보호 시스템은 여전히 빅토리아 시대의 틀을 따르고 있고, 너무나 많은 정치인이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멸을 감추지 않는다. 그리고 태도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해도 현재의 사회보호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하고 여기에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기존 복지정책이 갖고 있는 진입장벽, 전달비용, 관료의 부패, 수혜자의 존엄성 파괴라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저자들은 보편적인 기본소득을 바탕으로 하되, 의료나 아동교육조건이 유연하게 연계된 공공부조 정책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한다. 또한 앞서 살펴본 시장의 경직성으로 인해 취약계층이 받는 충격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더나은 일자리로의 전환을 위하여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업그레이드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편 의미 없이 돈만 지급함으로써 일하는 사람의 자존감을 배려하지 않는 공공일자리보다는, 돌봄이나 교육처럼 노동집약적이면서 사회적 수요가 높은 분야에서 공공예산을 확대함으로써 보다 의미있는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이러한 구체적 정책제안은 국가마다 상황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방향성에 관한 개별적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보장시스템이 존엄을 무시할 때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위축된다. 구성원들이 '절대로 실수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발점은 시혜적 태도에서 존엄을 존중하는 태도로 전환하고, 이를 전제로 전반적인 사회보장프로그램을 재설계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눈앞에 닥친 위기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기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책의 논지를 하나로 엮어 내긴 쉽지 않다. 위의 정리는 철저히 주관적 관점에서 재해석 한 것이 때문에 저자의 원래 의도와 다를 수 있다. 다만 저자들의 메시지는 여전히 시의적절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법인세 감면을 통한 낙수효과 이야기가 어김없이 재등장하는 것을 보니 씁쓸하기도 하다. 우리는 단순한 인과론에 기반한 가벼운 직관에 우리의 미래를 맡기고 있지는 않은가? 핀치에 몰린 집단의 존엄성에 관하여 고민하고 있는가? 그리고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공공담론은 적절히 생산되고 있는가? 많은 숙제를 남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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