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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잇부부 세계일주 Feb 20. 2020

신혼여행 중 처음으로 욕 방언이 터졌다.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ABC 트래킹 4130m 지옥 경험.


얼마 전, 뉴스에 화재가 되었던 네팔 히말라야 눈사태. 우리가 하루하루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눈사태로 사고를 당한 실종자 분들이 향했던 곳이 바로 우리 부부가 갔었던 코스. 안나푸르나 ABC 트래킹이었기 때문이다. 실종된 한국인 분들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오길 바랬던 며칠 동안 우리는 또다시 히말라야 트래킹 추억을 떠올렸다. 순간의 감정과 느낌이 또렷하면,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기는 커녕, 더 또렷한 잔상으로 남는다 했던가. 우리의 추억은 그 어떤 기억보다 더욱 선명하게 남아있다.


2019년 5월.

신혼여행으로 세계일주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쯤. 우리의 세계일주 버킷리스트 1위. 만년설의 산맥 히말라야 땅을 밟기 위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도 히말라야 트래킹을 위해서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라는 작은 마을로 이동해야 했다. 트래킹을 위한 모든 것들이 시내에 즐비해 있는 곳. 히말라야에 등정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과 히말라야를 등정하고 내려온 사람들로 나뉘어 있는 곳.


우리는 포카라에 도착해 트래킹을 위해 필요한 장비들과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구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터나 가이드를 섭외해 짐을 대신 들어주고, 초행길 안내에 도움을 받게 되는데, 우리는 서로 의지하면서 지도는 #맵스미 라는 어플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산속에서 지도가 되어주는 유용한 어플)로 위치를 파악하면서 다니기로 하고, 따로 포터나 가이드를 섭외하지 않았다.

* 하지만, 혹시 모를 안전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전문 포터나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면서 올라가길 권장하고 싶다.


6일에 거쳐 올라갔고, 2일에 거쳐 내려왔다. 총 7박 8일의 여정.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고, 가장 감격스러운 시간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생각하니 억울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보, 나.. 정말 너무 힘들어... ‘

-‘아니! 할 수 있어!! 좀만 더 올라가 보자! ‘

-‘아니.. 여보... 나... 내려갈래.... ‘


첫 번째 고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욕 방언을 트다.


-우리 그럼! 산속에 대고 시원하게 마음속 힘든 거 다 털어놔보자.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시작됐다. 내 마음속, 응어리졌던 모~든 것들이 나오는 순간이 1초도 채 되지 않았다.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ㅆ욕이....

히말라야 아니 이 수박 씨발라야~~~ 호박 씨발라야~~~
온갖 씨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띠리리리리리리리리 블라블라 블라블라...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 해답을 찾기도 한다.

어? 신기한 경험이었다.  


-여보도 해봐! 엄청 시원해졌어!

웃을 수도 없는 짜증이 가득해졌던 이 힘든 순간에 나의 욕으로 인해 우리 둘 다 풉하며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계속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상대가 욕을 잘해서. 그리고 상대가 웃을 수 있어서.


-여보, 이렇게 욕을 잘했던 사람이었어?

-여보도 해보라니까?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시작된 신랑의 ㅆ욕...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산속을 향해 질러 버렸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히말라야.

그리고 한발 한발 내딛는 건, 온전히 나의 몫.

다시 내딛을 수 있는 의지를 북돋아준 우리의 ㅆ욕..


그렇게 우린 힘들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해발고도에 따라 점차 새하얘지는 설경을 선물해주는 자연에게 ㅆ욕을 퍼부었다. 아무런 잘못 없는 자연에게 미안해지는 마음은 잠시, 우린 빵 뚫리듯 가슴이 시원해졌다. 그리고 웃었다.


그렇게 꼬박 6일 동안 아침 7시에 눈을 떠 오후 1시까지 중간에 에너지바와 초콜릿으로 배고픔을 달래며 하루에 6시간씩 산을 올랐다.

히말라야 산은 우리에게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부지런히 올라가야만 롯지(구간마다 운영하는 간이숙소)에서 쉴 수 있었고,

산을 더 오르고 싶어도 날씨가 허락해 주지 않았다. 오후 1시부터 시작해 늦은 밤까지 비 또는 우박이 쉼 없이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들 땐 욕을 잊지 않았다. 점점 빈도수가 잦아졌지만... 하루라도 더 빨리 하산하고 싶었다.

우리의 의지를 불태우는 데 필요한 그 모든 일들을 행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신혼 한 달만에 욕 방언을 텄다.


그리고 우리에게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해발고도 3000미터 이상에서 생기는 이상 질환. ‘고산병’
고산병 발생 : 데우랄리 (3200m) -> 마차푸르레 MBC (3700m) -> 안나푸르나 ABC (4130m)


고산병은 사람마다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래서 감히 누구에게 생길 것이고, 없을 것이고 확언할 수 없다.

체력이 강하다는 국가대표에게도 생길 수 있으며, 산행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기적처럼 고산병이 없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일어났던 사고 지점도 해발고도 3200미터 데우랄리였다. 이 곳에서 갑작스러운 폭설로 인해 도중 하산하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였다. 나에게 데우랄리도 역시나 마의 구간이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몸에 고산증세가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손 끝과 발 끝에 저림 현상이 일어나면서 심각한 두통 증상이 계속됐다. 이는 두통약을 먹어도 낫질 않았다. 고산증세로 인한 두통이었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둔 고산 약을 두 알이나 먹었다. 웬만하면 고산 약은 많이 아프지 않으면 먹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간에 무리가 가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나의 증상은 쉽게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었다. 중간에 고산 증세로 인해 도중 하산하는 한국인 분들을 수없이 마주치며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겁이 났다. 우리는 함께 트래킹을 하면서 길을 안내해주는 전문 가이드와 짐을 대신해서 들어주는 전문 포터가 없었기 때문에 나의 몸 상태를 지속적으로 체크해 줄 누군가가 없었다. 오로지 내 옆엔 함께 오르느라 고생 중인 신랑밖에 없었다. 아픈 아내의 짐까지 대신해 들어주느라 포터 역할까지 하면서 올랐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4일째 되는 날. 증세가 악화되는 과정에서 데우랄리 롯지(구간마다 운영하는 간이숙소)에서 하루를 머물며 몸 상태를 체크해 보기로 했다.


나의 고산증세는 이러했다.
- 높은 고도로 인한 극심한 추위
- 두통이 심해지면서 계속되는 구토 증상
- 손끝과 발끝 저림 증상
- 호흡 곤란 증상


괴로움의 수치가 100이 최대치라면 나의 상황은 100. 최악의 상황이었다.

같은 로지에서 머무는 다른 한국분과 동행하고 있던 가이드에게 나의 증상에 대해 물었다.


“약을 먹어도 낫질 않아요. 계속해서 남은 800m 올라갈 수 있을까요..?”

그때 가이드가 단호하게 한마디 했다.

절대 안 돼요. 당장 몸이 괜찮아지는 곳까지 내려가세요.
몸이 계속해서 안된다고 말하는데, 괜찮다고 위로하지 마세요.
건강해지면 다시 올라오면 되지만, 지금 죽으면 다신 못 올라옵니다.


나.. 죽는 거야....?

겁을 주는 걸까..? 도저히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함께 동행하는 신랑에게 미안함이 밀려왔다.

어떻게 올라온 건데... 이제 이틀만 더 올라가면 되는데..

신랑은 가이드 말대로 하자고 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돌아가자고.. 했다.


하필 고산증세가 나에게 찾아와서.. 가뜩이나 몸이 힘든데 마음까지 힘들게 만들었다.

죽을 만큼 힘들어도 죽진 않았으니까.. 더 천천히 올라가면서 조금만 더 약으로 버티면서 올라가 보자.라는 생각뿐이었다.

이대로 내려가는 건 죽기보다 더 싫었다. 어떻게 올라온 건데.... 내가 어떤 각오로 올라온 건데!

이번을 계기로 다신! 이렇게 높은 곳도, 아니, 산 자체를 다시는 올라오지 않을 것이란 다짐 하나로..!


그렇게 여러 감정과 생각들로 잠을 이루지 못한 그 날. 나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끝으로 나는 결국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모두가 말리는 상황 속에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그리고 마지막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눈 앞에서 벌어진 산사태.
데우랄리(3200m) -> 마차푸르레 MBC (3700m) -> 안나푸르나 ABC (4130m)

우리 부부는 5월에 트래킹을 했다.

그리고 그 해 2월, 트래킹을 했던 한 부부가 데우랄리에서 MBC로 가는 길에 눈사태로 인해 길이 막혀있어 도중 하산했다는 소식을 접해 들었었다.

트래킹 구간 중, 가장 길며 험난하지만 자연경관이 가장 아름다우며 감춰뒀던 히말라야의 설산을 마주하는 구간. (데우랄리 - MBC)

게다가 고산 증세로 따라주지 않아 힘차게 한발 한발 내딛으며 올라가는 이 여정이 평생 살면서 가장 잊히지 않는 구간이 되었다.

힘든 만큼 아름다웠기에. 처음으로 설산을 마주하며 걸어가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끝까지 도전해 보겠다고 다짐하고 펼쳐진 장관이었기에 자연이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걷고 있을 때 사건은 우리 눈 앞에서 발생했다.


우르르 쾅쾅!
(산사태 나는 소리)


“여보 뛰어!!!!!!!!!!”

(긴급한 신랑의 외침)

힘들게 걷고 있는 중간중간. 돌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천둥소리와 비슷하게 크게 울려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는 순간, 비가 오려나?라는 생각에 하늘을 봤는데, 신랑은 산사태 소리임을 알아채고 순식간에 나를 잡고 뛰었다.


그 순간, 우리 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순식간에 뛰어 오고 있었다.

모두가 바로 앞에 돌산이 무너지면서 발생하는 산사태에 즉각적으로 대응했고, 이 산사태 소리를 모두가 듣고 피하면서 사건은 발생한 것이다.


찰나의 순간.


다행히 이 사건은, 더 크게 발생되지 않았고, 다친 사람도, 길이 무너지지도 않고 잘 넘어갔다.

부상자가 생기지 않아 다행이었고, 즉각적으로 대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뿐만 아니라 몇 달 전 일어났던 눈사태로 인해 여러 군데 길이 소실되어 눈으로 온통 길이 덮혀져 있던 곳을 작게 길을 내어 모두가 한 줄로 조심조심 눈 길을 걸어야 하는 등. 위험한 구간들이 참 많았다.

사건은 찰나의 순간 일어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우리는 길을 걸었다.


히말라야 8000미터 급 14좌 완등을 하셨던 최고의 산악인. 엄홍길 대장께서 한 말씀이 떠올랐다.

산도 삶도 용기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이 허락한다.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을 잠시 빌리는 것이다.

산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산이 나를 받아주었기 때문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지

산이 나를 거부하면 내가 아무리 잘났어도 절대로 올라갈 수 없다.

산을 올라가다 보면 엄청 힘들 때가 있다.

그때 나의 가면을 벗을 수 있다.

나도 몰랐던 나를.

가야만 한다. 불가능은 없다.

산은 공들여 올라가는 자에게만 자리를 내어준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 큰 용기를 냈기 때문에 내게 허락해 줬던 히말라야.

두 눈으로 직접 봤던 그 어떤 자연보다 아름다웠던 푸르른 절경에서부터 새하얀 안나푸르나의 설산을.

어두컴컴한 새벽, 뽀드득뽀드득 밤새 내린 눈을 밟으며 걷던 길을.

산 뒤에서 봉곳하게 떠오르던 홍시 같던 새빨간 일출을.

정상에서 맛보던 시원한 물 한 모금을.

힘든 상황을 겪었음에도 등정하고 왔다는 그 자부심과 보람으로 꽉 차있는 나의 인생을.  


누구보다 잘했다고. 대견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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