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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달 Feb 13. 2021

인위적이라 더 인간적인, 짐작으로부터의 이별

페어웰(2019), 룰루 왕, 100분

※영화 〈페어웰〉과 〈최악의 하루〉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다 솔직했는걸요.


최악의 하루의 은희는 온종일 거짓말을 하다 하루가 간다. 하지만 영화 속 저 연극 대사 장면 속 은희만큼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 일이다. 남자친구 현오 앞에서는 적극적인 청춘의 발랄함을, 운철 앞에서는 비극적 사랑에 가슴을 졸이는 애달픔을 연출하던 그가, 유독 남이 써 놓은 대사를 그저 연기할 뿐인데 그게 진짜 같다니. 남산 벤치 건너편에 그럴듯한 소품이나 상대 배우는 없다. 오로지 혼자서 극의 상황에 몰입한다. 어쩌면 일상이 연기이고, 연기가 진실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해 본다. 내 앞에 거를 것 없는 바로 그 순간 오롯이 등장하는 나의 모습은 이 모든 게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숨길 수 없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사회에서는 때에 걸맞은 가면을 챙겨야 한다. 그게 나쁘다기보다는, 일부 불편함을 감수한 채 모두와 공생하는 방법은 종종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는 당위적 명제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약간은 편하게 대해도 되는 상황에서 본래의 모습은 튀어나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면을 벗을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혼자일 때가 아니라면 아마 가족과 함께일 때였을 것이다.


다시 은희에게 돌아가서, 이렇게도 생각해 보자. 은희의 대사가 모두 진실이라면, 자기 전 죄 없는 이불만 연거푸 걷어찼을 그날의 은희는 다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진실은 뭘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해야만 상대방을 속일 수 있다는 그 어려운 퀘스트를 은희는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영화 속 남자들이나, 바깥의 관객 모두 은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심사에 백 퍼센트란 없다. 오직 가능성과 짐작만 있을 뿐. 은희는 거짓말을 했지만, 그 안에는 다소간의 진실이 담겨있다. 우리는 모두 진실이면서 거짓인 삶을 산다. 똑 부러지는 이분법은 적어도 사람 사이에는 없어 보인다.


길었던 서론을 마치며, 영화 페어웰의 거짓말은 가족이라는 가능세계에서 지극히 인위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사흘간의 모험을 장식한다.



거짓말의 거짓말에 대하여

〈페어웰〉은 오프닝 크레디트부터 ‘Based on an actual lie’를 전제한다. 룰루 왕 감독은 자전적 이야기이자 그 소재가 거짓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친절한 설명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할머니의 시한부 사실을 숨긴 채 마지막 가족 모임을 준비하는 가족들의 고군분투와, 생각의 차이가 만드는 다각적인 갈등의 스토리는 거짓말이 초래한 진땀 빼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 속 거짓과 노골적인 거짓말을 해 보겠다는 앞선 선언조차도 실은 거짓말이다. 페어웰이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란 거짓말의 거짓말’, 즉 가족과 정에 대한 이중부정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가족에게는 내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가족만큼이나 진실한 나를 보여주기 힘든 존재도 없다. 그래서 서로의 감정은 쉽게 토라지고 상처 받는다.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우리 역시 명절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묘한 기싸움이나 고부간의 갈등을 보고 자랐으니, 영화의 장면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멀리 있으면 신경 쓰이고, 가까이 보면 또 다투고 마는 가족의 모습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관 앞에 혼란스러운 빌리의 시선에서 더욱 이질적이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미덕인 행위가 뉴욕 출신 빌리에게는 불법이 되어 버리는 상황은 낯선 충격이다. 다만 감독은 가치나 성격, 입장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어디에나 있고, 심지어 거짓의 상황에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출처: 다음 영화


〈페어웰〉은 거짓말과 진실을 적절히 섞은 끝에 따뜻하며 엇나간, 진심 어린 소동극을 만들어낸다. 영화 초반 식사 장면에서는 빌리의 아버지가 전하는 죽음에 관한 짧은 농담이 등장한다. 그 내용이란 한 가족이 죽음이라는 소재를 돌려서 말하려 노력하다가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인데, 이는 영화에서 할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합심하여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과 일치한다. 거기에 어머니 이미 그 농담을 들고 먼저 웃는 장면은 부모를 먼저 떠나보낸 비슷한 경험을 먼저 겪은 어머니의 상황과도 들어맞는다. 이렇듯 실없이 던지는 장난이란 의미의 농담에도 진실은 반드시 숨어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춘의 할머니는 뉴욕의 손녀에게 염려의 말을 건넨다. 이런저런 거짓말로 할머니의 걱정을 둘러대며 전화통화를 하던 빌리는 길을 가다 잠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통화 중에 누구와 얘기했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빌리는 ‘친구와 대화를 했다’라고 말한다. 이는 거짓말이지만 또한 진실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관객은 빌리에게 누구보다 온 마음을 주고, 빌리 역시 가득히 담은 사랑을 보냈던 친구는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모할머니가 언니의 병명을 숨기기 위해 지어낸 ‘양성 음영’은 현재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양성’과 별것 아닌 거짓 병명인 ‘음영’의 합성어이다. 아프긴 하지만 또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는 복합적 의미처럼, 영화 곳곳에는 이렇게 수많은 거짓말 속 진실이 담겨있다.




진심의 역설, 짐작하는 우리

할머니 한 명을 속이기 위해 빌리의 가족이 실행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는 가족의 진심을 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 고모와 어머니 간의 신경전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생활환경의 차이와 함께 자녀 교육으로 이어진다. 자식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타국에 보내는 부모의 심정은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애써 밝아야 하는 자식의 마음과 연결된다. 하지만 그 안에 정작 할머니는 없다. 슬픔을 감추고 행복한 여생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무지의 상태로 두는 것은 좋은 의도지만 당사자가 빠진 당사자의 삶이다. 모르는 척하며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의 선택은 오히려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주의적인 사고다. 아무것도 모르고 정리도 못 한 채 삶을 마무리해야 하는 할머니의 생각을 누구도 물어봐 주지 않는다. 오직 빌리만 할머니의 입장에 관심을 두고 함께 눈을 맞춘다. 할아버지의  앞에서 마치 살아 돌아온 것처럼 대하듯 영화의 가족은 죽어가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게 더 신경을 쓰고, 점차 모인 이유보다 모임 자체에 더 몰두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산 사람의 일상보다 기계적인 예식 절차에 주인공이 될 사람들은 뒷전으로 치이고 마는 관혼상제의 역설을 마주한다.


논리학의 가능세계에서는 단언할 수 없는 명제에 새로운 진리의 양상을 적용한다. 형식적으로 참과 거짓을 정하던 기존의 추론이 들어맞지 않은 경우가 생겨서다. 우리의 현실은 여러 가능성이 담긴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그곳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을 세계도 있으며 빌리가 미국인이 아닌 세계도 있을 것이다. 단언하기 어렵다면 더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흔히 참이면서 거짓인 것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삶이 언제는 뜻대로 돌아간 적이 있던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시공간에 사는 인간은 높은 확률로 가족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한다. 할머니의 삶이 삼 개월 남짓 남았다는 확률을 단언할 수 없듯 말이다. 어디든 완벽한 것은 없다. 행복도, 거짓말도, 사람도 활짝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리고 섣불리 짐작하지 않아야 한다고도. 하지만 빌리의 가족만 보아도 그렇게만 살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결론 내려고 하는 사람의 노력조차도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을 수 없다.




어두운 밤길에 은희와 료헤이는 거짓 같은 ‘최악의 하루’를 지나 해피 엔딩을 꿈꾼다. 걱정하지 말라는 마지막 말조차 거짓말로 들리는 건, 완벽한 것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일까. 그러니 거짓과 진심이 얽힌 서로에게 구십 구 퍼센트의 가능성을 들고도 YES OR NO를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 없 보인다. 그래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모든 가능성의 끝에서 단언해도 좋다. 어쩌면  세계에서 가능한 행복이란 복잡한 계산보다 단 한 번의 기함으로 탄생할지 모를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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