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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달 Jan 06. 2021

몸의 서사로 엉킨 관계의 고통스런 공존을 '쓰다'

에듀케이션(2019), 김덕중, 98분

※영화 〈에듀케이션〉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어떻게 보는가. 일견 철학적이고도 짐짓 구태의연해 보이는 질문을 누군가가 당신에게 던진다고 가정해 보자. 몸과 마음. 기억과 감정, 극장과 OTT를 넘나드는 체험의 순간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언제쯤 지나가나 시계만 바라보던 작년까지의 시간은 여느 때처럼 지나갔다. 언제나 미래의 어느 때 정도로만 남을 것 같던 2020년대에 마침내 발을 딛고 살게 된 우리는 극장을 벗어난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듣고, 느끼고, 본다. 그리고 여기 한 영화가 있다. 2019년 첫선을 보이고 2020년 전국의 관객들을 만난 영화 〈에듀케이션〉은 독특하고 오묘하다. 영화의 본질인 이미지의 현상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누군가를 만나고, 다투고, 정을 나누는 일상으로 쓰임을 바라고 쓰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연에 담긴,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내밀한 거스러미를 건들며 감응을 이끈다.



사람을 쓰다: 고용과 책임을 넘나드는 선

영화는 버거운 삶에 대처하는 두 인물의 탐색전을 건조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버팀목이라고는 없는 험난한 광야에 발을 딛고 선 성희와 현목은 마치 갓 태어난 야생동물 같다. 제 몸을 가누기도 아직 부족한, 연약하고 위험한 그들은 서로를 관찰하고, 경계하고, 서로를 향한 긴장을 유지한다. 털끝이 바짝 올라선 채 발톱을 꺼낸 두 사람의 신경전은 어쩌면 당연한 순서다. 둘은 첫 만남부터 서로를 침범하면서 시작한 고용 관계이기 때문이다. 성희는 스페인으로 이주할 돈이 필요했고, 현목은 집에 없는 동안 거동이 불가한 어머니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다. 장애인 활동 지원 업무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손길 없이는 생존이 불가한 누군가의 내밀한 세계에 침입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을 고용하여 일을 시키는, ‘쓰는 영화’로서 〈에듀케이션〉은 목적을 벗어난 사람의 쓰임과 두 외로운 인간의 삶이 감정과 책임으로 결합하는 이야기다.


출처: 다음 영화

다만 의견의 차이는 충돌로 이어지고, 집 안에는 긴장이 감돈다. 홀로서기가 자연스러웠던 성희는 의식적으로 기대기를 거부하고, 현목은 어릴 때부터 늘 익숙한 도움을 바란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이야기는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성희가 침범을 바라는 현목의 일상에 들어오며 일어나는 동상이몽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업무 첫날부터 성희는 자신의 영역을 정확히 규정한다. 하루 동안 현목 엄마를 돌보고 보조하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현목은 활동 보조 이상을 바란다. 두 사람의 정체성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창조한 방어기제다. 한 사람은 날카로운 심성을 주위에 두른 채 누구의 호의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유약함을 무기로 상대에게 감정적 동화와 보호를 바란다. 이는 모두 유효한 방식으로 거친 세상에 적용된다. 하지만 상반된 방식은 불가피한 충돌을 초래하고, 이는 고용주와 노동자, 성년과 미성년, 남성과 여성 등 다양한 레이어로 얽히며 분화와 결합을 지속한다.


몸을 쓰다: 움직이는 몸과 흔들리는 마음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이 석연치 않은 불안은 온몸으로 뿜어져 나온다. 동작과 행위, 신체의 공간감은 〈에듀케이션〉이 무엇보다 시각적 특성에 집중할 것임을 상기한다. 관객은 인물이 발화하는 대사의 전달이나 음향과 스코어로 발생하는 청각적 묘사를 배제할 때 비로소 몸을 쓰고 몸이 이끄는 새로운 영화적 지점을 발견한다. 성희는 얼마 전 사고로 허리를 다쳐 불편한 몸을 이끌고 활동지원사 일을 한다. 그리고 목의 엄마는 전신 마비 장애로 거동할 수 없다. 신체적 구속으로 엮인 두 인물 사이의 동질감은 두 사람이 바닥에 누운 채 찰나의 순간이지만 서로의 존재를 교감하는 장면으로 표현한다. 감정이 몸으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다른 청각적 부연 설명은 필요 없다. 오직 그 순간의 상황만이 스크린으로 보일 뿐이다. 거기에 영화는 버거운 삶이라는 현실에 벽과 문틀, 창문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스크린 안의 또 다른 프레임을 구축한다. 성희와 현목이 업무 시간 측정 문제를 실랑이하며 쓰러지는 장면이나 음식이 목에 걸린 현목의 어머니에게 응급처치하는 장면에서 제한된 프레임의 존재는 경계를 이루는 다른 배경 없이 오로지 그 안의 인물이 행하는 동작만 집중하게 만든다. 가두어진 프레임 속 반복된, 혹은 무작위적인 움직임은 잘 짜인 무용의 한 안무로도 보인다. 이러한 나열은 현실의 관계성과 고통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중첩되는 몸의 에너지와 그 반동으로 연결되는 움직임의 조합을 관조하는 관객은 생의 현실적이면서도 일면 오싹한 본질을 느낀다.      


영화가 신체를 쓰는 방식은 주체 각자의 역할과 범주에 균열을 일으키는 독특한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허리가 안 좋은 성희는 유독 눕거나 앉아있는 장면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어딘가에 기대거나 지지할 곳은 마땅치 않다. 성희가 그 모든 고통을 견디는 방법이라면 홀로 그 모든 감각을 삭히고 버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어 보인다. 이와 다르게 장애인 야학의 학생들이 발산하는 역동성은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한 존재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특히 장애인의 삶을 대하는 〈에듀케이션〉의 두 시선이 보여주는 움직임의 대비로 말미암은 파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영화는 목 어머니라는 인물로 대변하는 정물적 기능과 함께 은진이라는 인물이 가진 적극적인 생명력과 유머를 교차한다. 이로써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르는 관객의 시선은 분열되고 그 틈 사이 움직이지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성희의 혼란스러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존재한다. 야학 수업 시간에 음악에 맞춰 추는 성희의 격정적인 춤에 상대는 없다. 성희는 ‘헬조선’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지만, 그 안의 타인과 부딪치며 연결된 감정과 사람을 끝내 털어낼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성희를 향해 현목은 한결같이 기대며 도움을 요청한다. 관계의 스위치를 켜 준 현목은 다시 성희를 붙들어놓지만. 사람으로 축적된 감정은 여전히 억눌린 몸 안에 쌓여 통증만 안겨준다.


공간을 쓰다: 드나듦의 불안과 불발

〈에듀케이션〉의 공간은 좁고 황량하며 겉돈다. 각자의 영역을 넘나드는 침범의 영화는 정착할 수 없는 예사로운 공간에 모여 머물 곳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성희에게 현목의 집은 영화의 주요 사건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지만 시간이 되면 잠깐 머물다 가는 곳일 뿐 안식처로 쓰이지 않는다. 사실 성희가 들르는 모든 곳은 스페인어를 배우며 돈을 모아 비로소 숨 쉴 곳으로 가기 위해 잠깐 머무는 공간 정도다. 현목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짐처럼 여길 어머니가 있는 집은 아늑한 보금자리의 느낌은 들 수 없다. 스스로 경계를 쳐 놓았지만 정작 자신의 공간없는 역설은 성희와 현목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공간을 찾아가도록 만든다. 그래서 영화 안 인물과 그들이 지내는 공간에는 이질감이 공존하고, 영화의 중반부터 성희와 현목은 익숙하지만, 마음 놓고 정착할 수 없는 집을 떠나려고만 한다. 어쩌면 한 번도 사람에게 정착한 적 없는 이들에게 폐쇄된 곳에서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것만큼 어색한 것은 없다. 그래서 탁 트인 밖으로 나가는 성희와 현목, 어머니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그래서 진정으로 내 공간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만 다닌다.


영화의 사건은 머물지 못하고 방황하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해소할 수 없는 공허함은 결국 성희의 마음속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만 커진다. 성희는 소풍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현목을 털어낸다. 어머니를 함부로 대하는 현목에게 화를 내며 성희는 더는 관계를 지속하지 않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이제는 불안과 통증만 안기는 관계를 청산하고 내 통제가 가능한 공간으로 탈출하고 싶은 성희에게는 좋은 기회이다. 하지만 영화는 사람으로 맺은 감정이란 그렇게 쉽게 떨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공간,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결국 되돌아온 성희는 현목에게 그간 쌓인 감정을 폭발한다. 영화 마지막 있는 힘껏 드러내는 성희의 몸짓은 가장 진실한 감정인 불안과 당황을 내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짐작한다.  잠깐의 분노는 불발에 그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감싸는 상처와 고통은 사람으로 시작되고, 사람으로 끝난다는 것을.     




〈에듀케이션〉은 쓰이고 쓰임 받는 우리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말한다. 각자에게 서툰 사람들이 뒤섞인 세상에 불편하지만 건드릴 수밖에 없는 것을 가감 없이 전하는 영화 속 카메라는 도망치고 피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서 멀찍이 삶을 바라볼 따름이다. 그래서 〈에듀케이션〉은 집과 사람, 그 사이를 바라보는, 단언컨대 '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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