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2020), 리 아이작 정, 115분
※영화 〈미나리〉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나리〉는 꼬마 ‘데이빗’(앨런 S. 김)의 눈으로 바라본 80년대 미주 한인 가정의 삶을 관조하며, 어른이 된 지금 그 시간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리 아이작 정 감독은 트레일러 집의 경험이 어떻게 자신을 키웠고, 미국의 이민자이자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날 수 있었는가를 찬찬히 훑어본다. 무엇인가를 놓치는 아픔을 겪는다면 그 사람은 어제보다 더 성숙할 것이다. 도울 곳 없이 홀로 서 있는 근원적 고독을 지고 있는 이들에게 행복은 분명 있었다. 그 사소하지만 소중한 추억을 영화는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목가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화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뒤로한 채 데이빗의 가족은 하루하루 순탄치 않은 일상을 맞이한다. 한국산 농작물을 길러내 성공의 ‘빅 가든’을 일구겠다는 큰 꿈을 지닌 아버지 ‘제이콥’(스티븐 연)의 강력한 의지로 가족들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부실한 트레일러로 이사 온다. 도시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던 이들이 ‘촌구석’ 아칸소 언저리에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선언에 흔쾌히 끄덕일 사람이 물론 있기는 하겠지마는, 앤과 데이빗의 어머니이자 제이콥의 배우자인 ‘모니카’(한예리)는 당연히도 못마땅하다. 머나먼 타국 땅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그에게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트레일러는 복잡한 감정을 자아냈을 것이다. 게다가 심장에 이상이 있어 위급 상황을 대비해야 하는 데이빗 때문이라도 더더욱 도시와 병원과의 거리가 중요한 상황. 두 사람 모두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처지에 베이비시터는 꿈도 못 꾸는 데다가 점점 일을 벌여나가는 제이콥의 무모한 도전은 모니카의 심기를 건드리고, 자연스레 이사 이후 남편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다툼으로 이어진다. 부모의 싸움에 노출된 아이들과 위태로운 가정을 다시 세워보고자 모니카는 한국에 살던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시고 온다. 이민 이후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데이빗과 할머니의 첫 만남과 함께, 〈미나리〉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미나리〉는 미국의 발생 이념이자 정체성인 개척정신과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두 개의 큰 얼개로 만든, 그야말로 ‘미국 영화’다. 미국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던 과거의 끈질긴 개척사를 한 가정의 이야기로 압축시켜 놓은 영화는 이민자의 삶에 드리우는 불안과 충돌, 실패의 경험을 딛고 지금의 삶에 이른 이들에게 추억과 위안을 전해준다. 그래서 굳이 한국의 역사나 문화를 알지 못하더라도 이야기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가장의 짐을 진 아버지와 삶이 고된 어머니,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은 만국 공통의 모습이니 말이다. 다만 미국의 관객에게는 이질적인 한국의 정서와 문화적 체험을, 한국 관객에게는 익숙한 문화와 소품들이 할리우드 영화의 프레임으로 투과되었을 때의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너무나도 한국적인 정서의 감정과 행동을 세밀하게 표현한 점은 영화를 보는 한국 관객만의 소소한 재미라고 할 수 있다. 모기향과 돗자리, 화투와 고춧가루 같은 한국식 소품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나 말투로 이어지는 특수한 맥락은 서사와 더불어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이민 1세대 가정에서 태어났던 감독의 삶을 투영한 〈미나리〉의 가족은 바람 잘 날이 없다. 그들은 끝없이 생활고에 시달리며 사회에 만연한 인종 차별에 늘 노출되어 있다. 부부가 처음 병아리 감별 작업을 하러 간 공장의 노동자들은 전부 아시아인이다. 단순 육체노동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비영어권 이민자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다. 수평아리를 폐기하는 현장에서 데이빗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처절한 현장의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타인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물 대기 작업 같은 이웃 주민의 선의나,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미국식 수맥 탐사법도 마다한 채 네 가족은 한국인의 명석함과 자긍심을 위안 삼아 스스로 살아간다. 사실 그곳에 온 한인들의 마음은 비슷했다. 그 흔한 한인 교회 하나 없느냐는 모니카의 질문에 동료는 여기에 온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이민자의 삶에 위로와 치유가 된 공간에서도 상처 받는 이들은 분명히 있고, 그것을 피해 변두리 아칸소까지 온 이들의 삶은 그 대답 한 구절로도 짐작해 볼 만하다.
제이콥은 오롯이 자신의 손으로 이 가정과 땅을 일궈내 보겠다는 그 시대 한국 가장의 책임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공동체의 삶에서 느낀 환멸의 반동으로 결심한 개척은 그리 쉽지 않다. 트랙터 구매를 위해 들른 은행에서 직원은 당시 레이건 행정부의 농업 장려책에 대해 강조한다. 한국의 6-70년대 산업화 급속 성장을 겪고 80년대 레이건 시대에 들어선 제이콥에게 '팍스 아메리카나'의 달콤한 선전은 기회로 넘치는 이 비옥한 땅에서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원천이다. 레이건의 이민 개혁 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은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그의 임기 동안 추진한 레이거 노믹스는 중산층 이하에게는 부채와 양극화, 저임금 노동력의 착취라는 오점을 안겼다. 영화는 이민자를 품는 풍요의 땅에서 아메리칸드림을 들고 온 사람들의 상흔에 집중한다. 자유와 희망을 찾아온 이들의 앞에 놓인 신자유주의의 굴레는 수없는 실패를 경험하게 만들었다. 노력만으로는 쓸모없는 삶을 벗어날 수 없던 유색인 가족의 필사적인 생존 투쟁과, 그들을 비추는 따뜻한 햇볕과 평화로운 초원의 대비는 모든 것이 가능한 ‘기회의 땅’이라는 허상으로부터 곪아가는 현실을 보여준다.
한 가정의 미시사를 담은 영화라 할지라도 그들의 삶에 공감하며 관객은 점차 미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겪은 자신의 삶을 대입한다. 윤담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이 가족의 한 지점을 오려내 포근하지만 위태로운 일상의 리얼리즘으로 많은 이에게 의미와 공감을 끌어냈듯, 〈미나리〉 역시 한인 이민 가정의 작은 삶을 거대한 삶의 순환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위기의 가족을 보살펴 주는 두 안내자인 ‘폴’(윌 패튼)과 ‘순자’(윤여정)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미국에 정착하는 이들이 자랄 수 있게 돕는다.
폴은 제이콥이 처음 ‘빅 가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의 농사를 돕는다. 열정적인 기독교인인 그는 허름한 옷매무새와 과도한 믿음에 기인한 이상한 행동으로 주위의 입방아에 오른다. 한편으로는 감정적이며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끌고, 주일만 되면 교회에 가는 대신 직접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는 그의 행적에 사람들은 광인 취급을 한다. 하지만 그의 이름인 ‘바울(Paul)’은 관객에게 회개와 믿음, 그리고 미국의 초기 개척을 이끌었던 프로테스탄트의 노동과 금욕으로 통제된 삶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본인이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제이콥의 일손을 돕는다. 당시만 해도 공기처럼 익숙한 인종 차별도 그와는 거리가 있다. 첫 만남에 과거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을 말하며 눈물짓는 모습은 처참한 폐허로부터 한국인이 이만큼 걸어왔다는 감정과 함께 살육의 현장에 가담한 죄를 회개하는 자세로도 보인다. 이는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성찰하고 현재의 종교가 가져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일러 준다. 성실한 노동과 충만한 신앙, 모든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라는 개신교의 근본 가치를 잊지 않는 폴은 오늘날 교회의 방향성을 일러주는 동시에, 신의 은총은 가장 가깝지만 알지 못하는 곳에 늘 존재한다는 종교적 메타포를 담고 있다.
폴이 미국 건국사의 시초인 필그림의 삶과 종교의 가치를 일깨우며 가족에게 생의 의지를 북돋운다면, 순자는 가족의 뿌리인 한국의 정체성과 사랑을 상징하며 이제는 털어내야 할 과거의 유산 같은 존재다. 데이빗은 순자가 일반적인 할머니가 아니라고 하지만, 한국 관객에게 순자만큼 우리네 할머니를 닮아있는 인물도 없다. 미국의 관객이 낯선 한국 문화와 행동을 통한 새로운 경험으로 이야기의 흥미를 느낀다면, 한국의 관객은 할리우드 영화 속 너무나도 익숙한 한국의 이미지가 왜곡 없이 한국인의 시점으로 전해지는 공감과 반가움에 기뻐할 것이다. 딸 집에 갈 때면 음식 떨어질라. 있는 것 없는 것 없이 모조리 싸 오고, 화투 놀이에 추임새 삼아 시원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자막도 없는 프로레슬링 경기에 눈을 떼지 못하는 순자의 모습은 너무도 익숙한 우리의 기억을 되살린다. 그 밖에도 사소한 소품 하나하나 눈에 익은 것들로 가득하여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골라내는 소소한 재미도 있다. 그러면서도 철저한 미국 영화 식 작법에 맞춘 구성과 흐름에서 나오는 새로움은 어떤 범주로 나눌 수 없는, 특히 국적을 두는 것조차 의미 없는 영화임을 증명한다. 이는 윤여정 배우의 공이 크다. 친절하고 사랑이 가득하지만 분명 어딘가에 서늘한 그늘이 진 할머니를 탁월하게 해석한 연기를 보고 있자면 몰입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이 느껴진다. 영어 이름에 호격 조사를 붙여 말하는 할머니의 부름이 귓가에 떠나지 않고(“데이빗아!”), 손주를 향한 사랑이 전해지는 작은 행동은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순자가 심은 미나리는 이민자의 끈질긴 삶이자 그 자체로 데이빗을 닮아있다. ‘산 이슬 물’ 마운틴듀를 즐겨 마시던 데이빗처럼 미나리 씨앗도 깊은 산 계곡물을 마시며 자라고, 우려와는 달리 지금 이대로 두어도 충분히 잘 성장했던 ‘스트롱 보이’ 데이빗처럼 미나리도 씨앗만 뿌려 놓았을 뿐 그렇게 생을 이어간다. 미나리란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정통으로 들어맞아도 물을 찾아 낯선 땅 어디서든 뿌리가 번진다. 이는 데이빗, 가족과 한인 사회를 관통하는 뿌리 깊은 정서이며 상징과 같다. 하지만 영화 후반에 이르러 순자의 상황이 나빠지는 지점부터 영화는 살짝 방향을 튼다. 행복했던 일화들 사이 잠재되었던 갈등은 스며 나온다. 한 고비를 넘었다고 느꼈을 때 이미 저 밑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가정의 불화는 머리를 든다. 그리고 결말부의 순자가 일으키는 어떠한 행동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커다란 사건은 모든 것을 되돌아보고 마침내 이민자이자 미국인으로서의 삶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영화 대부분을 할애하며 가꿔 온 농장을 마지막에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아이작 감독의 잔인한 연출에 실은 적잖이 놀라기도 했다. 감독의 삶을 투영한 영화에서 어느 지점을 영화의 결말로 삼는가의 문제는 그가 하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이 깊다. 일상의 여러 행복과 희망의 순간을 제치고 영화의 마무리를 모든 것이 사라진 그때로 잡은 것은 어쩌면 순자라는 뿌리가 미나리라는 씨앗과 자리를 바꾸는 지점을 표현하고 싶어서였을까. 순자의 의도치 않은 실수는 부모 세대가 자식 세대에게 더 물려줄 것은 남아있지 않음을, 이제는 새로운 세계의 문법에 맞춰야 한다는 강한 자극으로 남는다.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고집, 냉혹한 현실 속 혈연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뭉쳐 자신을 지켜 온 데이빗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 왔지만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강조하며 마을 교회 커뮤니티에도 들어서려 하지 않던 그들의 뒤통수를 세게 강타하는 어떤 충격을, 감독은 과감히 그 가치를 전해 준 기성세대인 순자가 제 손으로 끊어내는 형국으로 만들어낸다. 모든 것이 흙으로 사라지는 순간,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공존의 철학은 상석에 앉은 배타적 가치를 잠깐 옆으로 무른 후 새로운 세대의 가치관으로 전환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리는 극단적인 새판 짜기는 아니다. 여전히 한국인의 정체성은 존재하지만, 역경 속에서 끝내 살아나야 한다는 간절한 의지가 만든, 아쉽지만 이유 있는 변화의 움직임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끝내고 퇴장하려는 순자를 돌려세우는 새 씨앗 데이빗은 이곳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갈 것을 맹세하고 있다. 〈미나리〉는 뿌리를 잊지 않은 채 새 씨앗을 심어야 하는 용기를 말한다. 그래서 영화 속 화마가 모든 것을 앗아갔다기보다는, 오히려 낯선 이방인에서 진정한 미국의 시민으로 살아갈 사람들이 삶의 절망 앞에서 담담히 이겨내 왔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에게 땅은 삶의 터전이자 고향의 이상향이다. 한국의 순자가 가지고 온 화투패의 언덕을 닮은 아칸소의 빅 가든이 될 때까지 제이콥은 흙에 목숨을 건다. 땅에 집착하고 한국산 채소를 기르려 분주했던 건 성공과 더불어 타향에서 늘 그리운 자신의 고향을 이 땅에 뿌리내려보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는 조상의 피와 땀이 섞인 고향 땅은 아니지만, 고향 땅에 준하는 공간을 만들어 성공하겠다는 목표만을 바라본다. 그러나 불안이 잠식하는 순간 막상 누구를 구할 처지조차 못했다는 스스로의 고백은 땅은 갖추었지만 경작 내내 물이 부족했던 상황과 연결된다. 땅만을 바라보다 미처 놓치고만, 메말랐던 가족과 공동체의 가치를 반성하며 제이콥은 모니카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눈치채지 못하였으나 미나리는 조용히 물가에 자리 잡아 제이콥에게 물로 상징되는 가족 공동체를 일러주고 있었다.
언제나 갈증에 목말랐던 제이콥은 지금의 선택을 바로잡아야 했고, 모든 것이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간 순간 그것을 깨닫는다. 고난과 역경이 집어삼킨 터전에서 결국 남아있는 것은 가족이었다. 서로를 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아니 그럴 만한 여력조차 없이 오래전 주어진 정체성을 지키기에 급급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것은 아니다. 그것마저 없어진다면 소멸하여 버릴 듯 위태로운 삶에 감독은 모든 이민자 가족에게 방향을 살짝 돌려 씨앗을 뿌린다면 충분히 생명의 원천인 수원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여전히 탐지법은 의뭉스럽고 삶은 힘들지만, 새로운 씨앗으로 커나갈 희망을 기약하며 데이빗 가족은 새롭게 시작한다.
〈미나리〉는 설익은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이민 생활의 단편을 애써 포장하지도 않는다. 가장 기뻐해야 할 순간에 이별을 고하고, 행복은 더 큰 불행으로 이끈다. 영화는 잔인한 삶을 천천히 기록하며 우리의 깊은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결국 희망을 말한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살아남는 인간의 사랑이 있기에, 미나리는 이름 모를 곳에서도 다시 한번 싹을 틔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