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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달 Feb 22. 2021

익숙한 행복을 삼킨 후 버리고 나서야 할 용기에 대하여

스왈로우(2019), 카를로 미라벨라 데이비스, 95분

※영화 〈스왈로우〉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식증(pica)이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이물질을 먹는 증세를 말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집어삼키는 행위는 주로 정신 사회적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며, 명확한 치료법이 없기에 그 원인을 규명하여 제거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성인의 경우는 종종 철분과 아연이 결핍된 임산부에게 발생하는 경우가 있으며, 부족한 영양소를 공급하여 치료하기도 한다. 왓챠에서 독점 공개된 영화 스왈로우는 이식증에 걸린 한 임산부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설명은 다 잊어도 좋다. 영화는 증상 자체보다 오랜 사회의 병폐로부터 오히려 스스로가 집어삼켜진 그 이후에 주목한다. 행복을 위해 버릴 수 있을 때를 기다리며 카메라는 주인공 헌터를 담아낸다.



배설과 전시, 억압의 컬렉션

번듯한 기업가 집안에 향후 그 명맥을 이어받을 가장 유력한 남자인 리치와 결혼한 헌터는 온종일 대궐 같은 집에 머무르며 남편의 삶을 보필하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하지만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헌터의 감정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식증 증상을 보인 것도 그때부터였다. 작은 호기심에서 욕망으로 번져간 집착은 점차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도전에 이른다. 헌터의 증상을 알아챈 가족은 이식증 치료를 시도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던 치료 방법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헌터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삼키며 지워버리고 싶던 과거의 기억으로 다가간다. 


〈스왈로우〉는 감독의 할머니가 1950년대에 겪었던 실제 삶을 재구성하여 만들어졌다. 결혼 이후 가족으로부터 통제와 억압의 삶을 강요받은 할머니는 특정 행위에 집착하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할아버지의 가족은 치료를 명분 삼아 그를 정신병원에 입소시켰지만, 이는 가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할머니에게 내리는 사실상의 형벌이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레이디 맥베스〉나 〈리지〉, 〈매혹당한 사람들〉 같은 시대극 서사가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래전에는 당연했던 질서에 저항하는 여성과 현대적인 배경은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감상을 자아낸다. 여성을 향한 부당한 대우와 차별, 사회가 강요하는 억압의 분위기에 던져진 헌터의 분노는 곧 행동으로 드러난다.

출처 | 다음 영화

헌터의 행위에는 자유로운 투입과 온전한 배출이라는 규칙이 붙는다. 그에게 삼키는 행위는 다시 배출하는 행위를 위한 전 단계다. 가족들의 끈질긴 치료가 통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겉으로는 이식증으로 보였겠지만 그 목적이나 초점이 전혀 다른 방향이니 먹힐 리가 없었다. 거기다 헌터 자신의 선택에 의한 투입이어야 그의 규칙에 들어맞는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음식을 건네더라도 원치 않은 투입은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의사나 남편에게는 삼키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그의 무의식은 배설과 창조라는 주체적인 생산 과정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헌터의 집착에는 가부장제라는 사회적 질서의 압박이 존재한다. 주체적 삶의 욕망을 거부당하고 오로지 아내와 어머니라는 수동적 삶을 강요당한 헌터는 은밀한 삽입과 그 결과물의 전시로 억눌린 감정을 표출한다. 위험한 섭취가 계속될수록 커지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그는 전보다 날카롭고 더 커다란 물건을 삼킨다. 삼키기 어려운 만큼 빠져나오는 과정은 그에게 더 큰 쾌락을 선사한다.


헌터의 행위는 보상받고 싶은 결핍의 개인사로 가득 차 있다. 애써 사소한 일로 치부하며 살아왔지만, 어머니의 강간과 보수 기독교적 가풍으로 태어난 헌터의 삶은 시작부터 외면받았다. 아버지의 존재를 신문을 통해 알게 되고, 가족에게도 버려진 헌터는 자신을 불완전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러한 인식은 온전한 형태로 남는 이물질의 배출로 자신을 위로하는 계기가 된다. 기대도 없이 일상을 살아온 헌터에게 새로운 가족은 처음 느끼는 삶의 희망이었을 테고, 지속적인 헌신과 사랑으로 자신이 남편의 가족 구성원으로 편입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헌터의 위치와 신분을 강조하며 철저히 선을 그었다. 비밀을 알게 된 가족들의 반응은 헌터를 정신이 불안정한 환자 혹은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만이라도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존재로 취급하고 있었다. 감독은 임신한 여성을 그저 가문을 이을 후손을 보관하는 용기 정도로 여기는 그들을 통해 온전히 자신의 의미로 존재할 수 없는 여성의 삶과 태아의 과대 대표성을 지적한다.


몸 안에서 자라 몇 개월 후면 빠져나올 태아는 헌터에게 특별히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아니, 사실은 고려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안에는 삶이 투영된 불안과 공포, 분노와 같은 복합적 감정이 담겨 있다. 내 뱃속에서 태어날 그 아이는 분명 절반 정도는 자신을 닮았을 것이고, 결핍과 불안, 미완성의 외로운 삶을 계승할지 모른다. 그에 비해 구슬은 먹은 그대로 형태를 유지하는, 예측 가능한 완성품이다. 불안에 떨 필요도 없이 말이다. 아마 헌터는 가족계획의 과정에서 답을 내지 못하고 주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식 생산에 소비되고 말 헌터에게 선택권은 없었을 것이다. 헌터의 두 가지 규칙에 모두 충족되지 않는 태아는 애초부터 그의 컬렉션에 누락된 목록일 뿐이다.


     


붙잡지 않은 채 버릴 여성의 용기

영화는 삼키는 행위에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중첩해 살아 있지만 외면받는 존재가 갈구하는 자신의 의미를 보여준다. 영화의 첫 시퀀스는 곧 있으면 도축되어 죽을 양의 눈동자와, 곧 헌터의 몸 안으로 들어가 생의 의지를 확인시켜 줄 구슬을 교차로 편집하며 순환하는 삶과 죽음, 그 안에서 피해받는 희생양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헌터가 청소기를 사용하다 미처 빨아들이지 못한 핀을 자신의 입으로 넣는 장면은 청소기로 대변되는 여성의 가사노동이 헌터로 집약되며 충돌하는 저항과 욕구의 이면을 드러낸다.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탈주하는 과정에서 전쟁을 피해 온 시리아 출신 난민의 도움을 받는다는 설정은 주목할 만하다. 접점이라고는 없는 이질적인 삶에서도 헌터를 이해할 수 있던 것은 억압과 폭력에 갇혀 희망조차 사치였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비-인간으로 살아온 동질감을 통한 두 사람의 공조는 비슷한 아픔을 이해하며 연결되는 약자 간의 연대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미스터리 스릴러의 긴장을 유지하던 영화는 헌터가 집을 떠나 자신의 친부를 찾아가게 되면서 한 여성이 감내한 굴레로부터 어떻게 탈피하는가를 보여주는 성장 이야기로 방향을 튼다. 로케이션 대부분을 차지하던 집이 기묘한 미장센과 서스펜스가 감도는 비현실적 공간이었다면 탈주 이후 헌터는 현실의 공간으로 들어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는다. 사실상 〈스왈로우〉는 두 개의 스토리로 진행되는데, 악화하는 병증으로 공포를 자아내는 스릴러와 한 여성의 과거사를 극복하고 새롭게 나아가는 성장 드라마가 동시에 진행되던 영화는 헌터의 탈주를 기점으로 새롭게 국면이 전환된다. 오갈 데 없는 헌터는 어머니에게 연락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리고 그는 평범한 가정을 꾸려 놓은 친부의 집에 찾아간다. 평생의 트라우마일 그의 존재를 기어이 쳐다보고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일견 작위적이면서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감독은 친부로부터 자신과 헌터가 다르다는 말을 들려주기 위해 어려운 선택을 한다. 과거의 지독한 굴레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끊어내는 과정은 고통을 수반한다. 헌터의 병이 여성을 위한 온전한 자기 결정권과 재생산의 은유였다면, 이제 남은 것은 수태의 진통을 끊고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의도치 않은 출생과 뿌리 깊은 낙인을 딛고 사랑받지 못한 삶을 붙잡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존감을 지키는 길임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영화는 헌터의 새로운 삶을 암시하며 끝난다. 하지만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헌터의 삶은 배출의 공간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는 가지지 못했던 가족의 사랑과 여성으로서의 자존감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이를 투입과 배출의 오브제로 얻으려 했지만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이 좁고 외로운 공간을 나갈 방법은 자신이 만들어 냈고 사회가 부추겼던 미련과 기억을 과감히 버리고 갈 용기다. 그리고 바깥을 나갔을 때, 헌터는 비슷한 고민을 머금고 지나가는 이들 사이에 섞여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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