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와 상징, 상징과 해석
저는 조던 피터슨 박사의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그의 번역된 저서들은 모두 읽었고, 그만의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깊이 존경하게 된 작가입니다. 무엇보다 피터슨 박사를 통해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었고, 그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저의 세계관 역시 한층 넓어졌습니다.
특히, 아래 영상에서 조던 피터슨 박사는 「헨젤과 그레텔」을 주제로 뛰어난 해석을 선보입니다.
https://youtu.be/KUjKdDXz2Bs?si=yUCoJiTrAAH2RViY
그의 해석은 언제나 깊이와 통찰로 가득 차 있지만, 저는 이 영상을 여러 번 보며 한 가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에서 말하는 ‘상징’의 해석 방법과 비교해 볼 때, 피터슨 박사의 해석은 이야기와 상징의 관계 중 ‘상징’ 쪽에 더 무게가 실린 듯한 인상입니다. 이야기 전체의 맥락이나 서사적 흐름보다는, 상징 그 자체의 의미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
저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봅니다. 이야기가 상징을 품는 이유는 단지 해석의 도구로 삼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이야기가 지닌 독자적인 힘과 그 안에 깃든 삶의 리듬이 해석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가다머가 강조하는 ‘놀이로서의 예술 경험’, 그리고 이야기의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은 상징의 해석을 넘어서는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말해봅니다. 「헨젤과 그레텔」을 해석하는 데에 한해서는, 저는 조던 피터슨 박사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번 곱씹어보아도, 제 해석이 조금 더 이야기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고 느낍니다.
이야기가 상징을 낳는 순간, 해석은 ‘이야기’의 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 이야기가 독자 각자에게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두 가지가 저의 해석적 신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