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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Feb 28. 2020

영화 같은 도시, 파리의 주인공이 되다

도전의 경유지 파리

나는 이미 장기간 여행 중이었다. 미국에서 거의 2개월 반을 지내며 마지막 여행지로 어디를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멕시코, 쿠바, 파리 중에서 한 곳에 가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어느 곳에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 일지, 또 어디를 가야 여행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수 있을지를 단정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와중 미국에 머물면서 알게 된 CF 감독 헥터(Hector)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장편영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나 또한 미국에서 멋진 작품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우리는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며칠간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은애>라는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뽑아낼 수 있었다. 이름은 같지만 서로 다른 여성인 3명의 ‘은애’가 각각의 장소에서 그들만의 삶을 살아내는 로드무비.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에서 간단한 스토리만으로 촬영을 할 수는 없었다. 고민을 하던 와중에 그는 파리에서 티저만 찍으며 관광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 보주광장(Place des Vosges) 옆에서 헥터의 모습. 첫 촬영 날 지하철 타기 전 동네를 둘러보았는데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한껏 들떠있었다.

“파리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야. 분명 네가 좋아할걸? 네가 그곳의 건축물과 멋진 미술품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 확신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고. 거기에서 영화 티저도 찍고 도시도 둘러보자. 내가 안내해 줄게.”


나는 파리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프랑스어를 단 한마디도 할 줄 모르기도 하고. 파리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곤 패션위크와 크로와상, 에펠탑이 있는 도시라는 것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곳으로의 여행을 잘할 수 있을까? 헥터가 안내해 준다면 괜찮을까? 그의 끈질긴 권유로 나는 파리에 가기로 했다.




은애가 사는 곳, 그리고 내 여행의 마지막 숙소


파리에서 은애의 캐릭터가 잘 표현될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숙소에서 촬영할 시간적인 여유는 없겠지만 나중에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다시 파리에 왔을 때 동일한 숙소를 예약해 촬영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벽에 그림이 몇 점 걸려 있고 욕조가 있는 아늑한 에어비앤비를 물색했다. 파리의 에어비앤비는 다들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해서 추리기가 꽤나 힘들었다. 여러 선택지를 만든 다음 회의를 하며 한 곳씩 지워나가기를 반복하다가 11구의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 옆의 숙소를 찾아냈다.

▲ 에어비앤비 숙소 주변. 문 앞을 나가면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11구의 파리 골목길.

파리에 밤늦게 도착해 체크인한 탓에 호스트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영어로 된 설명서와 집 열쇠를 전달받았다. 설명서에는 와이파이의 비밀번호와 숙소 이용 주의사항, 택시 서비스 번호 등이 적혀있었다. 호스트가 미리 온풍기를 켜놓았는지 실내 온도가 훈훈하게 올라와 있었다.

 

파리에서 만난 에어비앤비는 앱에서 보았던 사진들과 그대로 닮아있었다. 아니, 훨씬 좋았다. 골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주변이 고요하고 한산했다. 방에는 파리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무로 지탱한 천장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한옥을 떠오르게 했다. 나무로 된 좁은 계단과 흰 페인트 벽면은 스치면 분필 가루 같은 흰 가루들이 떨어져 나왔다. 도어록은 조금 낡은 버튼식이었지만, 호그와트 기숙사를 들어가는 것 같은 커다란 문은 열쇠로 열어야 했다. 파리의 오래된 건물에서 나는 낡은 냄새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나무에서 나는 본연의 향과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건물이 가진 집 냄새가 섞여 숙소가 아닌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 은애의 티저를 촬영중인 헥터의 모습. 그가 촬영을 위해서 가져온 소형카메라로 나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찍는 동시에 아이폰으로는 소장용 사진을 찍어주었다.

헥터는 숙소를 보자마자 파리의 은애에 대해 영감을 얻은 것 같았다. 나 또한 파리의 주변 환경과 에어비앤비를 통해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벽에서는 은애가 그린 그림을 걸어놓고 욕조에는 은애가 자주 쓰는 샴푸를 놓아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 하나만으로도 많은 모습의 은애가 그려졌다.




잊지 못할 촬영과 매력적인 장소들


우리는 에펠탑에서 사크레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e-Coeur)으로, 또다시 물랭루즈(Moulin Rouge)로 이동하며 은애를 연기했다. 오랜만에 하는 연기라 잘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촬영을 이어나갔다.


유럽이라서 그런지 연기하는 동안 다들 신경을 안 쓰는 눈치였다. 게다가 파리에서 아무리 유명하다는 관광지라 하더라도 뉴욕만큼 붐비지는 않았다. 덕분에 뉴욕에서보다 더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었다. 바닥에 그림을 늘어놓고 파는 화가의 설명을 듣는 은애의 모습과 에펠탑(Eiffel Tower)의 사진을 찍는 모습을 담았다. 영화인지 다큐인지 모를 그 경계선에서 촬영은 유연하게 진행되었다. 날아드는 비둘기와 에펠탑을 보면서 감탄하는 사람들 또한 영화의 훌륭한 재료가 되어주었다. 에펠탑은 보면 볼수록 반할만한 곳이었다. 촬영하면서 에펠탑을 다양한 곳에서 관찰할 수 있었는데, 파리의 낮은 건물들 속에서 녹슨 철골 구조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 공기가 좋고 날씨가 맑아 건물들과 함께 에펠탑이 잘 보였다.

헥터와 나는 에펠탑에서 몽마르트(Montmartre)로 위치를 옮겼다. 고흐, 피카소, 모네가 자주 찾는 카페 앞에선 지금도 수많은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작가들의 그림을 찬찬히 둘러보며 티저 촬영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자연스레 공원 옆에 자리하고 있는 한 교회로 걸음을 옮겼다. 크지도 않고 유명한 곳도 아니었지만 따스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헥터와 나는 조용히 사람들을 따라 교회로 들어가서 촬영을 이어나갔다. 사람들은 각자의 염원을 촛불 하나하나에 담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앞에서 기도했다. 내 여행이 잘 마무리되도록 그리고 촬영이 잘 이루어지도록.

▲ 몽마르트 언덕 옆 작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제단 위에 마리아의 이미지가 그려진 컵을 올려놓았다. 하나하나에서 많은 사람들의 소원과 염원이 느껴진다.

마지막 촬영지는 물랭루즈였다. 물랭루즈 주변에는 수많은 유흥가가 있었다. 심지어 유흥을 합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거리였다. 파리는 명성만큼이나 낭만적인 곳도 많았지만 이런 개방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 맞닥뜨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원래 내가 예약하려고 찾아뒀던 숙소가 이쪽에 있었는데, 헥터의 조언을 듣고 다른 곳으로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물랭루즈의 풍차. 명성만큼이나 화려한 네온사인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티저 촬영만 할 계획이었는데, 가편집을 해 보고 난 결과물이 너무 좋아서 다음날 추가 촬영을 진행하기로 했다. 적응하지 못한 시차와 열정적인 촬영으로 무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회의 끝에 강행하기로 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멋진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제의 몰입이 이어지면 더 좋은 촬영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비 오는 파리


▲ 스트라빈스키 분수광장(Stravinsky Fountain)

다음날은 비가 많이 왔다. 비 오는 파리는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아스라이 피는 안개와 함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살짝 가려져 거리는 중후한 분위기를 뽐냈다. 나는 우산을 쓰고 은애를 연기해 나가기 시작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풍경과 크기에 감탄하며 촬영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연기하는 중간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은애가 입어야 할 의상이 겨울의 파리 날씨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얇아서 열이 빠르게 올랐다.


몸이 아파 촬영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숙소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헥터는 체력이 괜찮아서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촬영을 마무리 지으러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대로 다음 날까지 숙소에서 끙끙 앓으며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정말 다행인 것은 가까운 곳에 슈퍼마켓인 모노프리(Monoprix)가 있어서 장 보기도 쉬웠다는 점이다. 에어비앤비에 기본적인 향신료가 미리 준비되어 있어서 간단한 음식을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간단히 끓인 쌀죽 덕택에 좋지 않은 몸 상태였지만 금방 나을 수 있었다.

▲ 큰길의 뒤편에 있는 작은 광장. 촬영 둘째 날의 첫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개인 시간도 갖고 이틀이나 누워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이 멋진 도시에서 일주일이란 시간은 정말 짧다고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다시 이 에어비앤비를 예약하겠지만 떠나는 건 언제나 아쉽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파리를 더 깊이 알아가고 싶었으나, 여행 막바지에 다다른 나의 체력 때문에 일단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래도 헥터와 나는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영감을 충분히 얻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그는 그의 나라로, 나는 나의 나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음 도전을 기약하며


서로 다른 타지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여행지에 올랐다는 것은 나에게 또 다른 희망을 안겨줬다. 아직 나는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도전하기에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여행이라는 게 그런 것이 아닐까? 다른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용기가 입증되었다고 생각한다. 긴 여행 동안 에어비앤비를 통해 서로 다른 집에 묵으며 많은 사람과 대화하고 경험을 공유하고 또 다음의 경험을 기약하기도 한다. 그건 호스트나 잠시 묵어가는 게스트에게도 멋진 추억일 것이다.

▲ 촬영 중 파리의 창밖 풍경을 보는 나

이번에 촬영한 티저를 바탕으로 헥터와 나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다시 파리에 방문하기로 했다. 여행은 끝났지만, 나의 다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금 더 부족한 부분을 다듬어서 은애를 표현할 것이다. 촬영을 진행하면서 스토리의 윤곽도 잡았고, 겨울이라는 계절이 은애에게 꼭 들어맞는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파리만이 가진 날씨와 공기, 사람들의 알싸한 눈빛들, 그리고 따뜻했던 이불속의 온도와 건물의 은은한 베이지색에서 오는 안정감 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시차에 적응할 틈도 없이 시작해버린 촬영과 갑자기 오른 열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지만, 그 이상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내 인생 처음 가본 파리에서의 장편영화 촬영은 어렸을 때 꿈꾸어왔던 것과 흡사했다. 전혀 다른 장소에서 캐릭터에 몰입하고 시나리오를 쓰려 골몰하고 티저를 보면서 자랑스러워도 해보고.


파리는 내게 도전의 경유지가 되었다. 다음 도전을 기약하면서 미래의 파리를 꿈꾸어야지.




에어비앤비 작가, 전수진

8년 차 연기를 하는 배우. 연기를 열심히 하다가도 이외의 시간에는 틈틈이 여행을 다니며 공상하기를 좋아한다. 작은 조각도 쉽게 지나치지 않는 성격. 좋은 영향력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만들려고 시도하는 중이다.

인스타그램 @junsoojin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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