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일간의 퇴사여행
때론 우연한 계기가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한다. 어쩌다 만난 한 사람이, 멋모르고 시작한 일이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나에게는 에어비앤비가 그랬다. 직장인에서 에어비엔비 호스트로, 퇴사 후 에어비앤비 게스트로서의 여정을 담았다. 어떻게 회사를 그만두고 발리로 떠나게 되었으며, 왜 발리였는지, 발리에서 생긴 일(?)은 무엇이며,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여행에 대한 힌트를 나눠볼까 한다. 60일 간 아니, 정확히는 62일간의 퇴사여행, 시작한다.
늘 모범이 되고 시키는 것을 잘했다. 고등학교 때는 3년 내내 학생회장을 했고 대학교는 4.41/4.5의 학점으로 단과대 수석졸업을 했다. 하지만 고용되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이었다. 에어비앤비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처음으로 예약 문의가 들어왔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스스로 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고 이 계기는 스스로 갖고 있던 한계를 깨부쉈다. 소비하고 고용되는 삶이 아니라 생산하고 고용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스로 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나는 퇴사를 결정하고, 발리로 떠났다. 한국에서 운영하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여행경비를 마련했고 27살에는 김대리 보다는 김준형으로 살아가기로 선택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고 회사는 다시 들어가면 되니까. 나는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18년 6월의 마지막 평일,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8년 7월 3일에 김대리가 아닌 김준형이 되어 발리로 떠났다. 정확히는 62일 동안.
인생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찾을까. 내가 좋아하는 음악, 여행지, 사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정답은 누구도 알려줄 수 없다. 내가 아니면 알 수 없으니까.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신뢰>의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너 자신을 밖에서 구하지 마라.’
나는 대학교 때 방학마다 해외를 돌아다녔다. 수능을 치자마자 두바이(Dubai)와 유럽으로 배낭 여행을 가기도 하고 대학교 방학 때는 가까운 동남아와 일본에서부터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까지 가기도 했다.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깨달은 것은 나는 휴양지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신들의 섬’이라고 알려진 발리는 자연경관이 빼어난 것은 물론이고 스쿠터를 빌려 여기저기 가기도 좋았으며 따뜻한 날씨에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것도 한 몫했다. 베트남이나 라오스에 비해 한국인이 많지 않다는 것도. 물론 그렇게 예상해도 실제로 가보면 딴 판일 수 있다. 하지만 베팅하지 않으면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도 말하지 않는가. 가장 큰 리스크는 리스크를 지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나는 발리라는 새로운 여행지에 베팅했고 그것은 내 최고의 여행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진득한 여행을 좋아한다. 그래서 여러 나라에 쉼 없이 발도장을 찍기보다 한 곳에 현지인처럼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카메라로 남기는 인증샷보다는 눈에만 담기는 낭만이 좋다. 이탈리아 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다. 어느 나라를 가든 수도는 별 기대를 하지 않는데 로마(Rome)는 아니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부터 바티칸(Vatican)까지 볼거리가 많아도 너무 많았고 그곳의 한인 민박도 너무 정겨웠다. 원래 계획보다 두 배나 긴 시간을 로마에서 머물렀다.
친구 4명과 한 달간 떠났던 동남아 여행에서도 그랬다. 혼자 가면 편하지만 외롭고, 같이 가면 불편하지만 즐겁다. 그래서 일정 조율이 중요한데 마음에 드는 도시를 만나면 늘 ‘하루만 더’를 외쳤다. 퇴사도 했으니 마음에 드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출 여유를 갖고 싶었다. 관광이 아닌 살아보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더운 7월과 8월을 지나 더위가 꺾이는 9월에 한국을 돌아가기로 했다. 62일이었다.
유명한 곳에 실망한 적이 많다. 나는 홍콩(Hong Kong), 마카오(Macau)도 별로였고 심지어 휴양지 중 하나인 보라카이(Boracay)도 별로였다. 소문난 잔칫상에 먹을 게 없다고 너무 유명하거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곳은 내 마음에 안 드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거기가 어디야?”라며 물어보는 장소가 인생 여행지가 된 경우가 더 많았다. 태국의 빠이(Pai)가 그랬고, 발리의 멘장안(Menjangan)이 그랬다. 남들이 유명하다는 곳은 딱히 관심이 없고, 늘 숨겨진 보석을 찾아 헤맸다. 여행을 할 때는 청개구리 본능을 숨길 수 없었다. 여행에서의 나침반은 오직 나의 감각에 달려있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보석만 찾는 것은 아니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도 있듯이 유명한 여행지는 그만큼 검증된 여행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발리의 가장 큰 여행지인 꾸따(Kuta)가 그랬다. 여행객으로 넘쳐나면서 해변, 쇼핑, 클럽, 바, 스쿠터가 가득했다.
호주, 태국, 송정, 제주에서 서핑을 배운 적이 있어서 서핑의 성지 꾸따(Kuta)에서도 서핑에 한 번 도전해보고자 했다. 그런데 한인 서핑샵은 물론이고 대체로 가격이 배낭여행객에게는 가볍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가. 중학교 때부터 전국을 여행하면서 히치하이킹도 하고, 밀라노(Milan)의 프라다 아울렛에서 부모님 선물은 골라두고 한도초과가 떴을 때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돈을 빌린 사람이다.
바로 에어비앤비 앱을 켰다. 에어비엔비 체험에는 내가 원하던 서핑 프로그램이 있었다.(예스!) 심지어 세계서핑대회에서 입상한 챔피언의 수업도 있었는데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챔피언의 수업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의 수업을 들으면서 결국 한 친구에게 정착했다. 내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서핑을 알려주는데 하루 종일 배워도 2만 원이 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무리하다 결국 갈비뼈에 금이 가는 사달이 나기는 했지만. 뭐, 원래 여행과 인생엔 별의별 일이 다 있는 게 아닌가?(라고 말하고 침대에서 일어날 때조차 아팠다)
피로골절인 듯했다. 쉽게 말해 지속적인 충격을 받다 보니 뼈가 약해져서 금이 가기 직전의 상태. 이대로 서핑을 한 번만 더 하면 갈비뼈가 골절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행 온 지 얼마 됐다고 돌아갈 수도 없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여행자 보험은 늘 최소한의 비용으로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들고 간다. 어느 여행을 떠나든 나는 비상약도 꼼꼼히 챙기고. 그런데 갈비뼈가 말썽이니 딱히 내가 가진 약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병원을 가기도 귀찮았다. 군대에서 다친 이후로 어떤 증상이 있으면 찾아보는 게 습관이 됐다. 어떤 약이 근골격계에 도움이 되는 소염제이며 뼈가 붙고 회복하는데 좋은 것들을 찾아봤다. 약국에 가니 다행히 소염제와 함께 글루코사민처럼 뼈에 도움이 되는 보조제 역시 있었다.
파스도 쿨파스와 핫파스 역시 모두 구입했다. 외부의 충격으로 생긴 상처는 으레 붓기 마련이기 때문에 다치고 나서 24시간 내에는 쿨파스로 붓기를 가라 앉혀줘야 한다. 그 이후에는 핫파스로 뭉친 근육과 통증을 풀어줘야 한다. 매일 파스를 바르고 하루 세 번 소염제와 글루코사민을 먹었다. 문제는 술도 못 마시고, 너무 심심하다는 것.
내 꿈은 뽀로로다.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놀고먹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안다고, 안 놀아보면 시간이 있어도 못 논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누고 가치를 만들면 숭고한 인생인 거고.
갈비뼈가 성하지 않으니 운신의 폭이 아주 협소해졌고 여행의 자유가 확 줄어들었다. 뽀로로가 되기 위해 생각해야 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놀 수 있을 것인가. 발리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액티비티를 찾아봤다. 말 그대로 액티비티라서 그런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낚시 말고는.
그렇게 낚시를 시작하게 됐다. 꾸따에는 낚시할 만한 곳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바로 발리의 서북부, 멘장안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다와 그보다 아름다운 바닷속을 가진 곳. 바닷가에서 사슴이 뛰노는 곳이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낚시를 경험하는 나는 조금이라도 큰 파도가 덮치면 뒤집어질듯한 전통방식의 배를 타고 낚시를 갔다. 그리고 잡았다. 다음날 또 나갔다. 낚시의 손맛을 봐버렸다.
숨 쉬듯이 협상을 하는 사람이라 아예 헬스장 끊듯이 낚시 이용권을 끊고 할인을 받았다. 치공(Cigong)이라는 친구는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었고 오전에는 낚시투어로 돈을 벌고 오후에는 근처 호텔에서 셰프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잡아 올린 물고기 손질부터 사시미까지 완벽했다. 살아온 인생 자체가 DIY인지라 물고기를 잡으면 내가 회를 뜨기 시작했다. 회를 떠 놓고 보니 간장과 와사비로 어찌어찌 먹기는 했는데 별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초장이 아주 절실히 그리웠다. 친구에게 보이스톡을 걸었다. "마, 초장이랑 오징어 좀 가져온나."
나에게는 친구 한 명이 있다. 우리는 부산에서 같은 동네에 살았고 중학교 동창이었는데 그걸 대학에 와서야 알게 됐다. 그러다 이 친구가 안동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서울에 올 때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 그때마다 같이 술을 한 잔 하고 때론 피씨방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친해졌다.
발리행 티켓을 이미 끊어둔 상태에서 안동에서 친구가 올라와 한 잔 했다. 그리고 술김에 여름휴가 내서 꼭 발리로 놀러 오라고 했다. 헤롱헤롱한 상태로 서로 약속을 했는데, 진짜 티켓을 끊었다. 역시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막상 친구가 올 때가 되니 친구보다 초장과 오징어가 더 기다려졌다. 그 한국의 맛이랄까. 여기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센스 있게 캐리어에 컵라면까지 챙겨 왔다. 그렇게 우리는 멘장안에서 같이 물고기를 낚고 낚은 물고기를 요리해 먹으면서 지냈다. 팔뚝만 한 물고기를 낚아서 직접 회를 뜬 뒤 초장을 발라 먹었을 때의 감동은...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갈비뼈가 성치 못했기 때문에 눈 뜨고 일어나면 조식을 먹고 낚시를 하러 갔다. 물고기를 잡고 숙소로 돌아와 잡은 물고기를 주방에 요리해달라 요청을 드리고 졸리면 잤다. 자고 일어나서 모바일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게 뽀로로의 삶인가 싶었다.
발리에 여행 왔다는 놈들이 하도 낚시만 하고 물고기 잡아서 계속 가져다주는데 심지어 잡은 것도 나눠주니 숙소 주인장 내외와 친해졌다. 특히 하우스키퍼인 에디(Edi)는 우리보다 동생이었는데 순수하고 남을 잘 돕는 친구였다. 비슷한 또래인데 맨날 집에만 있으면 심심할 테니 주인장에게 이야기를 하고 일이 없는 시간엔 에디를 데리고 같이 낚시를 나갔다.
전통적인 줄낚시를 하면서 싸구려 장비로 낚시를 하는데도 한 없이 즐거웠다. 수평선 위로 번지는 일출도 아름다웠고, 마지막 남은 신라면 컵을 나눠 먹을 때도 꿀맛이었다. 때론 물고기가 많은 지점에서 스노클링을 하기도 하고, 썰물 때만 드러나는 섬에서 사진도 찍고 놀았다. 낚시가 끝나면 에디가 멘장안에 있는 천연 노천 온천에 데려가 줬다. 우리는 거기서 현지인 가격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숙소에 온 게스트를 내가 안내할 정도가 되었다. 주변에 마트는 어디 있고 옆 동네로 건너가려면 시간과 비용은 얼마나 걸리는지, 스쿠터와 차량 렌트는 얼마인지 빠삭했다. 당연히 주인 내외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인 내외 중 여자분의 아버지가 그 동네의 구청장(?) 같은 분이었다. 그래서 마을 행사가 있으면 이 부부가 꼭 참석하곤 했는데 어느 날 우리에게 전통의상을 입히더니 발리의 돌잔치를 같이 가게 됐다.
현지에서 언어습득이 유달리 빠른 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언어를 이미 발리어로 나름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 구청장의 두 번째 아들이다(?)’와 같은 자기소개를 이미 에디에게 배우고 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도 있었다.
마을의 행사에 전통의상을 입고 참여하면서 의식 때 마시는 술도 함께 마셨다. 우리는 그들에게 영원한 이방인이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웃음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나이, 인종, 언어를 뛰어넘어 인간으로서 공감을 하는 순간이. 그다음 날은 늦게까지 푹 잠을 잤다.
다시 낚시를 하러 갔다. 이제 치공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애써 알려주었던 부산 사투리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갈비뼈가 다친 상황에서 나에게 또 다른 행복을 알려준 친구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멘장안은 기본적으로 동양인들이 여행을 거의 오지 않는다. 길을 가다 동양인을 보면 다시 돌아볼 정도로 사람이 적다. 반면에 서양 사람들은 꽤 많이 온다. 특히 바닷속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스쿠버 다이빙을 하러 오는데 이 중에서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내가 치공한테만 낚시를 배웠겠는가. 여기저기 가보니 이 친구만큼 전문적인 장비와 지식으로 물고기를 잡는 친구는 없었다. 그뿐인가 잡은 물고기 회까지 떠 준다. 이 친구가 잘 되기를 바랐다. 돈 버는 걸 도와주고 싶었다. 본격적으로 돈 벌어주기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에어비앤비에는 숙소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체험 프로그램을 예약할 수 있는 ‘에어비앤비 체험’이 존재한다. 그 친구의 낚시 투어 프로그램을 에어비엔비 체험과 트립어드바이저에 업로드 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지금까지 잡은 물고기 중에 가장 큰 물고기 사진을 모으고, 고객과 함께 투어를 하는 사진들을 모았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경희대학교 공식 페이스북을 몇 년간 관리해오기도 하고, 카드뉴스 만드는 알바를 한 적이 있어 그 가닥으로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만들어갔다.
그럴듯한 구색이 잡히고 우리는 등록을 완료했다. 영어도 할 줄 아는 친구였기 때문에 고객과의 접점만 있으면 얼마든지 잘해 내리라 믿었다. 그 이후 곧바로 우리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어떻게 되었는지 뒷 이야기는 잘 모르겠지만, 부디 잘 먹고 잘 살면서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발리라는 새로운 여행지에 베팅했고 그것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가 되었다. 일몰이 아름다운 꾸따비치에서 내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서핑을 배우기도 하고 비록 갈비뼈에 금이 가기는 했지만 덕분에 낚시로 친구도 여럿 생겼다. 친구의 에어비앤비 체험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자세히 적지는 않았지만 20시간에 걸쳐 발리 섬을 떠나 참치를 잡으러 가기도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 있다. 여행이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것. 여행이 인생 그 자체이고 인생 그 자체가 여행이라는 것.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다. 여행도 그렇다. 인천공항을 떠나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알았겠는가 발리에서 갈비뼈에 금이 갈 줄. 그래서 낚시에 빠지게 될 줄.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 하루는 나를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 미운 우연도 있겠지만 고마운 우연도 있다. 그게 여행이고, 인생인지도.
이태원에서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는 ‘30일 인증 자기계발 커뮤니티' <한달> 플랫폼 주인장. 한 번뿐인 인생이니 재밌게 놀다 가겠습니다. 나누기도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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