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옥토버 스카이>
누군가는 하늘 너머 우주를 보며 꿈을 꾸지만, 누군가는 지표면 아래에 있는 현실을 살아간다. 이 영화, <옥토버 스카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만들어내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의 갈등, 그리고 화해의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로켓을 쏘며 우주를 꿈꾸는 아들 호머 힉캠(제이크 질렌할), 생계를 위해 탄광에 인생을 바치는 아버지 존 힉캠(크리스 쿠퍼). 이들이 사는 곳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탄광에서 일하게 되는 작은 마을 콜우드이다. 별다른 사건이 없다면 광부라는 정해진 길을 걸어갔을 호머는 소련의 첫 인공위성 발사에 감명을 받는다. 10월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별(인공위성)을 목격한 호머의 감격으로부터 영화는 본격적인 전개를 맞이한다.
그런데 부자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내러티브, 꿈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 탄광마을이라는 공간적 배경. 어디서 본 듯하다. 바로 <빌리 엘리어트>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옥토버 스카이가 1999년 작품이고, 빌리 엘리어트가 2000년 작품이니 시기적으로도 유사하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호머는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가 그러했듯 자신의 꿈인 로켓에 열정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땅으로 고꾸라지고,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날기도 하며, 발사대에서 폭발해버리는 그의 수많은 로켓들처럼 그도 여러 난관에 봉착한다. 그중 가장 높은 장애물은 바로 아버지와의 갈등이다. 아버지 존에게 호머의 꿈은 그저 덧없는 몽상일 뿐이다.
하지만 가족 간의 갈등을 그리는 영화에 언젠가 ‘화해’가 등장할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더불어서 이 영화는 친절하게도 곳곳에 화해에 대한 복선을 준비해두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여러 광부들이 아버지 대신 호머의 조력자 역할을 수행한다. 로켓을 용접해 주고, 부품을 구해주기도 하며 기술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아버지이다. 여기에 탄광에서 생산되는,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가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호머는 그 증기기관차의 레일을 팔아 로켓을 만들 자금을 마련한다. 이렇게 석탄, 탄광으로 대표되는 아버지는 여러 오브제로 대체되어 끊임없이 호머와 연대를 이어간다.
그래서 결말, 마지막 로켓 발사 장면에 가서야 그려지는 부자간의 화해는(예상하였던 시퀀스이다 보니) 큰 울림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화해는 다른 데에서 의미를 찾는다. 사실 호머의 꿈은 하늘, 아버지의 현실은 땅이라는 극명히 대비되는 공간적 심상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꿈과 현실 중 어떤 것이 좋은 것, 나쁜 것이라고 구분 짓지 않는다. 영화의 다양한 시퀀스 상에서도 꿈과 현실 모두에 동등한 비중을 두고 그것이 가진 중요성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비록 누군가의 꿈이 현실을 외면한 채 하늘만을 바라보는 것이고, 누군가의 현실이 고개를 떨궈 땅만을 바라보는 일이라도 말이다. 그저 현실과 꿈 모두 존중받아야 할 것, 그들 각자의 선택이니 만큼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빛을 발할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부자간의 화해를 통해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키워드는 ‘꿈꿀 권리’가 아닌 ‘존중받을 권리’이다.
<옥토버 스카이(October Sky)>,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