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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pine Nov 22. 2020

작은 위로

영화 <내가 죽던 날>




끊이지 않는 유명인의 자살 소식에 슬픔과 우울감을 떨쳐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아픈데, 그들의 가족과 지인들은 얼마나 거대한 아픔을 감당해내야 할까.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상실감뿐만 아니라 살뜰히 살피지 못했다는 자책까지, 너무나 큰 마음의 짐을 떠맡았을 것이다. 하루빨리 남겨진 이들이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길 바랄 뿐이다. 그들에게 이 영화가 작은 위로를 건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소녀 세진(노정의 분)이 외딴 섬의 절벽에서 몸을 던지고, 그 사건을 자살로 종결짓기 위해 현수(김혜수 분)가 그 섬으로 파견되며 시작된다. 사건을 조사해 나가며 소녀의 죽음에 얽힌 비밀들을 하나둘 파헤쳐 나간다는 시놉시스만 보면 마치 미스터리 스릴러로 이야기가 흘러갈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여성 간의 연대를 그려내는 드라마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자연스러운 플롯, 훈훈한 메시지 전달까지, 아쉬웠던 결말은 차치하고 올해 또 하나의 괜찮은 여성 영화가 나왔다고 해도 좋을 만하다.


주인공 현수와 세진, 순천댁은 물론 현수의 친구인 민정 그리고 섬 주민들까지. 인물들은 차곡차곡 감정을 쌓아가고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누군가는 이 과정을 지루하다고 느끼겠지만, 갑작스러운 전개로 인물의 감정에 이입할 수 없게 되거나 한국식 신파와 같은 감정 과잉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영화의 플롯은 포스터에 등장하는 부제를 통해서도 유추해볼 수 있는데 ‘내 안의 나를 만났다’, ‘그리고 삶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 두 문장은 영화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이후의 글엔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내 안의 나를 만났다.’


현수와 세진은 공통점이 많다. 매일 밤을 악몽에 시달려 잠들지 못하고, 자해 때문에 비슷한 곳에 흉터가 있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허망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세진은 그 상황 속에서도 애쓰고 노력한다. 주위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들의 관심과 애정을 요구한다. 홀로 남은 이 상황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목놓아 소리친다. 반면 현수는 주어진 상황을 외면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이혼 소송을 앞둔 남편과 얘기를 나눠볼 생각은 없으며 변호사와의 약속도 잊어버리기 일쑤이다. 복직을 택한 것도 다시 일하다 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수동적인 태도에서였다.


그랬던 현수가 세진의 목소리를 들었다. 현수는 세진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낸다. 세진에게 보냈던 연민을 스스로에게도 전하며 나를 위로하고 삶을 버텨낼 힘을 얻게 된다. 이제 자신의 문제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살아내기로 마음먹고 싸우고 부딪혀 보기로 한다.


‘아무도 안 구해줘. 네가 너를 구해야지.’ 순천댁의 이 대사에 그녀들의 선택지는 정해져 있다. 세진과 현수는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구해내고자 한다. 결국엔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이었지만, 그걸 이끌어 낸 동인은 공감과 연대이다. 순천댁과 세진의 연대, 세진과 현수의 연대. 그들을 삶의 현장으로 다시 소환해내는 것이 바로 이들의 연대인 것이다.



‘그리고 삶은 다시 시작되었다.’


영화는 클리셰로 가득 찬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훌륭한 선택이라고 할 순 없지만 메시지 만큼은 명확해진다. ‘살아라. 그럼 언젠가 좋은 날이 있을 것이다.’ 작위적인 결말에 당위성이 부여되는 것은 바로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응원과 위로가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결코 주어진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부딪히고 상처를 남길지언정 견디고 살아내야 한다. 그럼 언젠가 좋은 날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메시지 전달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 메시지를 실천하는 방법도 함께 제시하는데, 이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바로 사람 간의 관계와 연대이다. 이 영화는 말한다. 관계와 연대를 통해 우린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고. 긴 인생을 잘 버텨내며 살아갈 수 있다고. 뭐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무력감,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 앞에 어쩌면 이미 나와 있는 답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상에 치여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그 가치를 반복적으로 주지시켜 줄 필요가 있다. 옆에 있는 사람들과 팔짱을 꼭 끼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몰려오는 파도에 추위에 쓰러지지 말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허지웅 작가가 혈액암으로부터 돌아와 쓴 책 <살고 싶다는 농담>에 나온 글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 내가 보았던 천장과 바닥을 감당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 어둡고 축축한 구석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정확히 뭐라고 호소해야할지 조차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피해의식과 절망과 비탄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애꿎은 주변을 파괴하며 오직 비관과 자조만을 동행 삼아 이 모든 건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 믿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할 거라고 말이다. 여러분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만이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명에게 천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죽지 못해 관성과 비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지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 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 허지웅 <살고 싶다는 농담> 중



<내가 죽던 날>,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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