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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pine Nov 29. 2020

외로움과 가까워지기

영화 <박화영>




기성 사회로부터 배척당한 박화영은 자신만의 성을 축조해 나간다. 그녀를 버린 기존 세계에 대한 반발심과 거부감이 커질수록 그녀가 쌓아 올리는 성벽은 높아져만 간다. 박화영이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오는 일은 없다. 그저 성 안에서 다시는 상처받기 싫은 마음으로 수많은 비난과 욕설을 밖으로 쏘아댈 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그 성은 기성세대들 뿐만 아니라 또래세대까지 배척한다. 꼭꼭 걸어잠근 성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쌓아 올린 성벽이, 욕설과 거친 행동들이 그녀의 내면을 감추는 훌륭한 방어기제가 되어주지만, 그녀의 외로움을 해갈하진 못한다. 아니, 더는 상처받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결국엔 그녀를 더욱 고립시킨다.


‘니네는 나 없으면 어쩔뻔 봤냐?’ 셀 수 없이 외치는 이 대사에 박화영의 외로움이 처절하게 묻어난다. ‘난 너희한테 필요한 사람이야. 그러니 오래 함께 하자’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타인의 인정이 그녀가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엄마로부터 버림받은 그녀가 스스로 엄마의 역할을 부여하여 가출 청소년들을 거둔다.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며 그들과 친구가 된다. 그렇게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억지 관계 맺기는 단지 표면적인 외로움만을 상쇄시킬 뿐이다. 성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외로움은 그녀의 성을 떠날 마음이 없다. 깨진 독에 물을 붓는 일이다.

 


특히, 은미정. 그녀가 박화영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은미정이 사라지면 박화영의 세계는 무너진다. 이 때문에 박화영 그녀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은미정을 떠나 보낼 수 없다. 어떠한 무리한 요청이 있더라도 그녀는 거절할 수 없다. 무거운 바위를 영원히 산 위로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은미정이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를 반복해도 그녀는 은미정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벗어날 마음조차 없다. 부조리함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한 외로움의 형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와의 관계를 맺어보는 것이다. 두꺼운 성벽을 쌓기 전에 성 안에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하나 채우고, 외부로부터 침입해오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성 밖을 경계하는 게 아니라 성 안을 잘 살펴봐야 한다. 건강하게 형성되지 못한 박화영의 자아는 언제나 위태로워 보인다. 단단한 성벽, 껍데기만 존재하는 그녀의 자아에 친구들이 다가갈 수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관계를 맺기 위해 성문을 두드려도 친구들을 마중 나올 존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까. 안타깝게도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들이 박화영을 보는 시선은 변하지 않는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고 코로나가 종식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다시금 집에 머물며 관계를 멀리해야 할 때가 찾아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중학교 때부터 배워온 것 같은데, 그 명제를 실천할 수 없게 되었다. 외로움과 한층 더 가까워져 볼 때이다. 나도 다시 성 밖이 아닌 안을 잘 살피고 내실을 다지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박화영>,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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