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성향과 더불어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나는 애늙은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었다.
애늙은이라는 뜻은 생각하는 것들이 또래와는 다르게 더 많은 나이대의 사람과 비슷하다는 건데 그 당시에는 그 말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애늙은이라는 말이 성숙한 생각을 하는 아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어딘가 갇혀있는 아이'라는 뜻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또래처럼 밝고 자유롭지 못하고 어딘가 갇혀있는 아이.
우리 집은 아빠의 수입이 괜찮았기에 남부럽지 않게 살았었고 늘 놀러 온 아빠 친구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홀로 우리를 키우시던 아빠가 조금 더 잘 살아보자고 시작한 배 사업이 망하면서 그로 인해 우리 집은 가난해졌다.
한순간에 아파트를 잃게 됐고, 우리는 시골의 셋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빠의 친구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때였다.
다른 친구들은 과외나 학원으로 입시준비를 할 때, 나는 참고서 하나 살 돈도 아까워서 늘 책방을 서성였고 친구들에게 참고서를 빌려서 공부를 했다.
그래도 나름 엉덩이가 무거워 성적이 상위권은 아니더라도 중상위권을 벗어난 적은 없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대학진학에 대해 아빠와 상의를 하게 됐다.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아빠의 대답은 단호했다.
"대학 가지 마라."
나와 한 살 차이 나는 언니는 나와 같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었는데 머리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수능을 보고 몇 개의 대학에 합격했었는데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다.
그 당시에도 학자금 대출이 잘 되어있었는데, 언니는 왜인지 대학을 포기했고 나도 그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 상황이 나에게 똑같이 온 것이다.
아무리 설득을 하려 해도 아빠는 등록금을 지원해 줄 여건이 안되기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라는 말만 하셨다.
평생 대출을 받아보지 않았던 아빠는 학자금 대출에도 마음을 열지 않으셨다.
계속해서 대화를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 아빠는 등록금을 1년에 4번을 내셔야 하는 줄 아셨고, 대출이자도 대부업체에서 받는 고금리로 생각하셔서 강하게 반대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겨우겨우 아빠를 설득해서 얻어낸 허락이었는데...
그때 재생불량성빈혈을 판정받은 것이다.
대학병원이라는 곳을 처음 가본 가난한 시골학생에게 처음 든 생각은 '병원비 어떻게 하지?'였다.
산정특례제도*가 무엇인지, 차상위본인부담경감**이 무엇인지 몰랐던 학생이라 입원 내내 집안의 주머니사정만 걱정했다.
*산정특례제도 : 희귀질환자로 확진받은 자가 등록절차에 따라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신청한 경우 본인부담률을 10%로 경감하는 제도
**차상위본인부담경감 : 희귀난치성 · 중증 질환자, 만성질환자(6개월 이상 치료를 받고 있거나 6개월 이상 치료를 필요로 하는 자) , 18세 미만의 아동이 속한 세대의 소득 인정액이 기준중위소득 50% 이하이고, 부양의무자 기준을 충족하는 자에게 요양급여비용을 지원해주는 제도
언니까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내 병간호를 시작했기에 더 걱정이 되었다.
마음 편히 치료에만 전념해도 모자랄 판인데, 병원비에 언니직장에 입시까지 걱정하고 있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늦은 밤까지 병상에서 교과서를 펴고 공부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음에 또 큰 병이 들게 되면... 그땐 죽어버릴 거야.'
이게 18살 학생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최선의 생각이었다니.
그 당시에는 가족들을 더 이상 힘들게 하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산정특례제도로 인해 병원비가 굉장히 줄어들었으며, 다니던 교회 선생님이 사회복지공무원이셔서 내 소식을 듣고 차상위본인부담경감 대상자로 신청하여 병원비 걱정은 안 해도 될 만큼 부담이 없어졌다.
훗날 이 모든 경험이 나를 사회복지의 길로 이끌어주었고, 또 사회복지공무원이 되게 된 큰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경제적 여건으로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어디선가 지금도 울고 있을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내가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