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프고 나서야 깊게 깨닫게 되었다.
고3 여름, 희귀난치성질환인 재생불량성빈혈을 판정받고 나는 바로 담임선생님께 모든 상황을 알려드렸다.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헌혈증이 필요하다는 말도 어렴풋이 한 것 같다.
본격적인 치료는 수능 이후에 진행하기로 결정되고 학교로 돌아갔을 때, 나는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됐다.
바로 헌혈증 150장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헌혈증에 나는 너무 놀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담임선생님도 아닌 사회선생님께서 직접 교내 방송으로 내 상황을 설명하고 헌혈증을 기부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회선생님과 나는 대화를 한 적도 없고 지나가다 인사만 하는 정도였는데 나를 위해 직접 교내방송까지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너무 감사했다.
헌혈증에 쓰여있는 친구들의 이름, 또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읽다 보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입원 중에는 매일 회진을 돌며 치료에 전념해 주신 교수님과 주치의 선생님이 계셨고, 밤낮으로 내 상태를 살피러 오시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계셨다. 본인 자식처럼 나를 챙겨주는 친척들이 계셨고,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바로 간호사 선생님과의 인연이다.
입원을 하게 된 후부터 나는 매일 새벽에 혈액검사를 위해 채혈을 해야 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간호사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잠귀가 예민한 나는 로봇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채혈하러 들어오시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늘 깨어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누워있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간호사 선생님들은 새벽에 잠도 못 주무시고 일하시는데 나까지 누워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늘 깨어있었다.
그렇게 입원생활을 이어가던 중, K간호사 선생님과의 특별한 인연이 만들어졌다.
K선생님은 새벽에도 앉아서 채혈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신기해하셨다.
마음과 마음은 통하는 법인지, 왠지 모르게 K선생님은 다른 간호사 선생님과는 다르게 나를 마음으로 보살펴주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K선생님이 오시는 시간을 더욱 기다렸었다.
1인실에서 탈출하고 며칠 후 컵라면을 먹고 식중독에 걸렸을 때, 나는 다시 고열로 집중관심 환자가 되었다.
열이 나서 정신이 혼미했지만 정확한 열의 원인을 찾기 위해 해열제 처방이 늦어졌었다.
언니가 제발 한 입만 먹으라며 죽을 입에 갖다 주어도 먹을 힘조차 없었다.
그때 나를 가장 챙겨주신 분이 K선생님이셨다. 매시간 내 상태를 체크하러 오셨고, 누구보다 더 나를 신경 쓰고 계시다는 것이 느껴졌었다.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입원생활이 막을 내리고 퇴원날이 되었다. 3주가 넘는 기간 동안 나를 따뜻하게 보살펴주신 K선생님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수줍음을 무릅쓰고 쿠키와 음료수를 K선생님께 드렸다. K선생님은 안 받으려고 하셨지만 내가 막무가내로 저의 마음이니 받아달라고 하면서 두고 도망치듯이 나왔다.
퇴원 후 나는 고3학생으로서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오니 택배가 와 있었다. 택배를 뜯어보니 K선생님의 편지와 다이어리가 들어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읽었다. 새벽이든 낮이든 혈압을 재러 올 때면 벌떡 일어나 앉아 있는 모습이 신기하고 귀여웠다, 그리고 간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환자에게 개인적으로 마음을 보이는 것이 안되기 때문에 더 신경 써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 앞으로 대학생이 될 텐데 하루하루 즐거운 대학생활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 다이어리를 선물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정말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그 당시 병을 이겨내고 일상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 잘해서가 아니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셨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라는 책의 주인공 이름은 '아마리'인데, 이는 본인이 직접 지은 가명이다.
‘アマリ(아마리)’는 ‘나머지, 여분’이란 뜻으로 ‘스스로 부여한 1년 치 여분의 삶’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따금씩 나는 생각했다. 재생불량성빈혈을 판정받은 이후로 내 삶은 '아마리'가 아닐까?
발병 이후의 그 시간이 나에게는 추가로 주어진 여분의 삶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삶을 더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7년이 지나고 그 다짐들이 바래져 갈 즈음, 나는 내 삶에서 진정한 '아마리'를 마주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