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0년 2월, 세종이 붕어했다. 뒤를 이어 문종이 즉위했다. 안평대군은 국상과 즉위식 때문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문종이 즉위하고 몇 개월이 지나자 궁궐에서는 더 이상 안평대군을 찾지 않았다.
안평대군은 비애당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간간이 부왕인 세종대왕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바마마의 뜻을 따라 조선을 태평성대의 나라로 만들겠습니다.”
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의 모습이 백성이 꿈꾸는 태평성대와 같다고 믿었다.
‘중국이 아닌 조선 땅에서 무릉도원을 찾아야 한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례가 필요하다.’
안평대군은 궁궐 주변의 산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백악산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인왕산 자락과 만나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폭포가 보였다. 간신히 폭포를 넘어가니 넓은 들판이 나타났다.
[부암동 무계정사 터. 커다란 바위 면에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씨가 큰 현판 모양으로 새겨져 있어 이곳이 무계정사가 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오호, 여기 산세와 계곡은 내가 본 무릉도원과 아주 비슷하오. 저 앞에는 넓은 터가 있네요. 동굴을 지나 본 꿈 속의 공간과 아주 닮았소.”
사실, 그곳은 무릉도원과는 전혀 닮지 않았고 그저 평범한 계곡에 불과했다. 동행하던 박팽년이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말한다.
“아, 네. 대군께서 그리 보시니 무릉도원과 닮아 보이기도 합니다.”
성삼문이 박팽년의 옆구리를 찌르면 슬며시 말한다.
“닮고 아니 닮고는 중요하지 않소. 닮지 않았다면 닮게 만들면 됩니다. 대군께서는 의지를 밝히시는 것이오. 무릉도원은 찾아내는 곳이 아니라 만들어야 하는 세상인 줄 정녕 모르시오?”
“왜 모르겠소. 대군께서 너무 태연하게 말하시니,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소. 하하하...”
“정말 명당입니다.”
안평대군이 돌아보니 노비 한 명이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다. 김보명이라는 자로 풍수지리에 밝다고 하여 데려왔다.
“여기에 집을 지으면 자손들이 흥하고 만대에 임금이 배출될 것입니다.”
안평대군은 의심의 눈초리를 하며 말한다.
“나 또한 풍수지리를 보는 눈이 있다. 네 놈은 무슨 근거로 여기가 왕이 나올 자리라고 하는 게냐? 설령 그렇더라도 나는 무릉도원을 좋아할 뿐이지, 속세의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단종실록)
“여기에 집을 짓고 주변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을 것이오. 여기뿐만 아니라 한양 전체를 복숭아꽃으로 물들일 생각이오. 복숭아꽃이 없는 무릉도원은 있을 수 없소.”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3년 후, 부암동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었다.
무계는 무릉도원 계곡이란 뜻이다.
안평대군은 한양에 복숭아나무를 의도적으로 심기 시작했다.
“조선팔도에 복숭아나무로 뒤덮게 하려면 우리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나무를 심고 가꾸게 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시오.”
“현재 조선에는 마땅한 여름 과일이 없습니다. 참외나 포도, 딸기, 수박, 다래 따위가 전부입니다. 세종대왕께서 재위하던 시절, 궁궐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가 수박을 훔쳐 먹자 장 80대의 형벌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만큼 여름 과일은 귀합니다. 산에서 나는 복숭아나무는 열매는 작고 볼품이 없으며 맛이 텁텁하여 백성들은 거의 찾지 않습니다. 이를 단맛이 좋고 큰 열매를 맺도록 개량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복숭아, 돌복숭아로 부르는 토종 복숭아다. 크기가 작고 맛이 좋지 않아 백성들이 외면했다. 조선 후기 기록에 복숭아는 어른 주먹 크기라고 했다. 다양한 품종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현재 우리가 먹는 복숭아 열매는 대부분 일본에서 개량한 품종을 수입한 것이다.]
“일단 산속에 있는 나무를 캐서 집 마당에 심어야 합니다. 사람이 가꾸다 보면 점차 좋은 복숭아나무로 변해갈 것이오. 백성들을 믿어 봅시다.”
산에서 내려온 복숭아나무는 조선 땅 어디에서도 잘 자랐다. 백성들은 접붙이기를 통해 꽃이 아름답고 큰 열매가 자라는 품종을 만들어냈다.
복숭아나무는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정말 좋은 나무입니다. 봄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고, 여름이면 달콤한 열매를 한껏 먹을 수 있지요. 복숭아의 씨앗은 기침이나 간에 좋은 약재로 쓰고, 잎은 달여서 뿌리면 파리나 모기를 퇴치할 수 있습니다.”
한양뿐만 아니라 지방 관청에서도 복숭아나무 심기를 권장했다.
복숭아나무 심기는 곧 팔도로 퍼졌고 조선은 점차 복사꽃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박문수(朴文秀)는 인왕산 일대의 봄 풍경을 보고 ‘희고 붉은 자두꽃, 복사꽃 만 가지에 가득 피었네’라고 했고, 유득공(柳得恭)의 시에도 ‘도화동 복사꽃 나무 1천 그루’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람들은 복사꽃 아래에서 꽃놀이를 즐기며 태평성대를 노래했으며, 여름이면 복숭아를 배 터지도록 먹었다고 전한다.
복사꽃에 대한 노래는 어릴 적 흔히 불렀던 ‘고향의 봄’에 담겨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동요는 일제강점기인 1924년 지었다.
이 노래는 고향을 빗대어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고 있다. 당시 일본은 조선팔도의 복숭아나무를 베어 내고, 그 자리에 사꾸라를 심고 있었다.
[정선/필운대 상춘/수묵담채/27.5*33.5/1740~50년대/개인소장.
필운대는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바위 언덕을 말하는데 인왕산 중턱의 전망대를 의미한다. 선조 때 재상을 지낸 이항복의 집터가 있던 곳이면서 현재는 배화여고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그림은 제목처럼 필운대에서 꽃놀이하는 선비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버드나무와 복사꽃이 만발한 서울풍경은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안평대군은 무계정사에 1만 권 장서를 갖추고 여러 문인과 함께 시회를 열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