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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Sep 10. 2024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꽃그림-궁중모란도 4화

순왕후가 도화서를 방문했다.

규장각 관리와 칼을 찬 내금위장을 대동했다.

내금위는 대통령 경호실과 비슷한 기관인데, 영조 때는 300여명의 엘리트 무사를 보유한 막강 군사조직이었다.    

  

“느닷없는 방문에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저의 혼례에 필요한 그림을 제작하느라 수고한다고 들었습니다. 약소하지만 고기와 술을 준비해 왔습니다.”   

  

비단 장옷을 벗자 정순왕후의 얼굴이 드러났다.

소박하게 단장한 모습은 여느 처자와 다르지 않았지만, 절제되고 예의 바른 말과 행동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누추한 곳을 방문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도화서는 처음 와 봅니다. 다양한 미술재료, 많은 그림을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모란그림이 많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네. 가례에는 십장생도를 비롯한 다양한 그림이 사용됩니다. 그중에서 모란 병풍이 가장 많습니다.”    

 

“목화 그림은 없는지요?”    

 

느닷없는 질문에 화원들은 긴장했다.    

 

“목화를 그린 전통이 없고 남아있는 작품도 없습니다.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사회적 상징이 없는 것입니다.

도화서 화원에게는 생소한 꽃입니다.”   

  

“소문으로 들었습니다만, 제가 간택되는 과정에서 목화가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한 것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별제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목화가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기에 여느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신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민본정치에 적합한 대답이어서 임금께서 흡족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화서는 정치를 하는 곳이 아니기에 정치적 평가나 비평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미술적으로 질문하시는 거라면 대답하겠습니다.”   

  

“그렇군요. 정치적 문제가 아니니 편안하게 대답하셔도 됩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매화, 모란, 국화가 군자의 꽃이라면, 목화는 백성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자의 최종 목표는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목화. 목화로 옷을 만들어 백성의 삶을 풍요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 그림에서 목화의 상징은 없고 그리지 않았다.]


“백성의 행복은 물질적 풍요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애당초 조선 땅은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

정기적인 가뭄과 홍수, 역병에다가 무더운 여름과 길고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합니다.

한정된 땅을 일구기 위해서는 모든 백성이 똘똘 뭉쳐야 합니다. 이렇게 생산한 물질 재부를 공평하게 나누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정치문제가 복잡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모든 백성이 굶어 죽지 않고 살려면, 임금을 비롯한 권력자, 사대부들이 욕망을 절제하고 백성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면서 백성의 삶에 복무하는 군자의 힘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군자의 힘이란 무엇이오?”     


“군자는 양심의 결정체이자 인격의 지향점이지요.

매화, 모란, 국화는 군자의 상징이 붙어있습니다.

희생과 절제, 예의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정치를 추구합니다.”   

  

“목화가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지만, 공공의 가치는 없단 말인가요?”   

  

“조선은 신분에 따른 의복의 차별은 없습니다. 양반이나 천민도 같은 옷을 입습니다.

다만 고급과 저급이 있지요. 부자는 비싼 옷을 입고 가난한 자는 싼 옷을 입습니다.

목화는 그 자체가 물질 가치입니다. 사고파는 재화이지요.

고급 옷을 입는 부자가 목화를 아름답게 볼 수는 있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목화는 보고 수용하는 사람에 따라 미추가 달라집니다.


목화가 백성을 위한 꽃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을 부추겨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위험도 있지요.”    

 

“모란을 아름다운 여성에 비유하지요. 하지만 아름다움도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매화나 모란이 군자의 꽃이라고는 하나, 언젠가는 시들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군자의 양심도 흐트러지지 않겠습니까?”    

 

“양심은 매화나 모란처럼 흔들리고 시들어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임금께서는 매년 새로운 그림을 그려 하사합니다.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처럼 매번 양심을 다지고 새로워야 한다는 뜻이지요.”     


“먹지도 못하고 열매도 맺지 않는 모란이 목화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선뜻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백성의 가난을 뒤로하고 탁상공론이나 하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정순왕후는 총총히 돌아갔다.      

[바람 맞은 모란을 그렸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정형화된 모란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의 국운 기울고 군자가 없는 시대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별제가 심각한 표정으로 모란 그림을 보고 있다.  

화원 신한동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십니까?”    

 

“정순왕후의 말이 계속 생각납니다.”    

 

“목화가 백성의 꽃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으셨나 봅니다.”    

 

“아니요. 먹지도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하는 모란, 피고 시들기를 반복하는 모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소.”     


“그냥 자연의 이치가 아닙니까?”   

  

“우리가 모란을 그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알기 위함이 아닙니다.

모란이란 꽃을 통해 군자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함이지요.

군자는 어떤 경우라도 흔들리면 안 됩니다. 군자의 가치가 훼손되면 조선은 망합니다.

완전무결하고 불가역적인 모란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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