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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Aug 17. 2024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꽃그림-궁중모란도 3화

도화서 앞마당에 커다란 천막을 쳤다. 

수장고에서 모란 10폭 병풍을 꺼내 천막안에 펼쳐 세웠다. 

그림은 높이 240cm, 길이 700cm 크기였고 마치 거대한 벽면 같았다.


오래된 모란 그림을 보수하기 위해서는 먼지를 털어내고 냄새를 빼내어야 한다. 

차비노 길동과 상길이는 부드러운 붓으로 조심스럽게 먼지를 털어낸다.

먼지 제거 작업이 끝나자 배첩장이 병풍 뒷면의 비단과 광목천을 벗겨내고 격자판에 고정된 그림을 분리해 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기 몰려들었다.    

  

“저 모란 병풍은 50년도 넘은 것이라지?”   

  

“무슨 소리. 내가 듣기론 100년이 훌쩍 넘은 것이라던데.”    

 

“저기 꽃 색깔 좀 보소. 오래된 그림인데도 모란꽃이 오늘 핀것처럼 느껴지네.”  

   

그림이나 글씨에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병풍이나 화첩(畫帖), 족자, 책 따위를 꾸미고 만드는 것을 배첩(褙貼)이라고 한다.

표구(表具)는 일본식 표현이고 장황(粧䌙/裝潢)은 중국식이다.    

  

이런 배첩을 전문적으로 하는 장인을 배첩장(褙貼匠)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흔한 모란그림이다. 세밀하게 그리는 공필기법을 사용했으며 실제 모란꽃과 완벽하게 똑같다.]


도화서에 소속된 2명의 배첩장은 병풍이나 족자를 만드는 일, 그림의 보수, 복원하는 일을 했다. 

왕명이 담긴 교지부터 전국 각지에서 올라 온 상소를 비단에 배접하는 일까지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배첩장에게 지도를 배첩하여 족자를 제작하고, 왕의 영정을 보수하는 일을 맡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 병풍을 제작한 옛 배첩장의 기술은 놀랍습니다. 이음새가 벌어진 곳이 없고 격자형 그림틀은 아직도 튼튼합니다. 배접의 상태도 좋습니다.”    

 

“그림을 배접지에서 떼어내야 하지 않소?”  

   

“배접은 총 3번을 했는데, 그림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이걸 분리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공력이 듭니다.

이건 보수가 아니라 복원에 가깝습니다. 차라리 새로 그림을 그리는 게 빠르고 비용도 절약할 수 있습니다.”

     

화원 신한동과 장벽만이 모란 그림을 여기저기 살펴본다.     


“이 모란그림은 요즘과 조금 다르네요. 물감이나 붓질하는 법도 차이가 있지만 무엇보다 모란의 구도와 형상이 조금 복잡해 보입니다.”     


“모란 병풍은 궁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그림이네. 이는 도화서 화원들이 가장 많이 그렸다는 말과 같지. 

자네도 알다시피, 그림은 변주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법이네. 

변주하는 과정에서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고 화가의 능력이나 감성이 끼어들기도 하지.”  

   

변주(變奏)는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선율, 리듬, 화성 따위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연주함. 또는 그런 연주’이다.

변주는 음악 용어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쳐 사용된다.      

변주를 미술적으로 풀이하면, 완성되어 사회적으로 인정된 작품을 충분히 배우고 체득한 다음, 시대의 흐름이나 정서를 반영하고 발전된 기법이나 재료 따위를 사용해 변형한 작품이나 창작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개념과 비슷하다.    

  

변주는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마치 부모에서 자식 세대로 연결되는 과정에서의 차이나 속도와 비슷하다.

우리 그림뿐만 아니라 서구를 포함한 대부분의 미술은 모두 변주라는 방식을 통해 발전한다.  

   

도화서는 역대 왕의 어진부터 [십장생도], [책가도], [오봉도], [모란도]와 같은 채색화의 화본(畵本)을 보관한다. 

도화서에서 제작했던 모든 그림의 화본이나 제작 과정, 물감 만드는 방법, 채색기법, 사용한 물감, 화지의 종류와 가격까지 꼼꼼하게 기록하여 남겼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한 국가미술기관의 미술적 전통과 경험은 고려의 [도화원]을 거쳐 조선의 [도화서]로 이어졌다.

1000년이 넘는 위대한 유산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약탈, 훼손, 은폐되어 버렸다.      

[민화풍의 모란그림이다. 실제 모란과는 차이가 있는데, 이는 사물을 제대로 관찰하지 않았고 표현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민화는 실물이 아니라 화본을 보고 그리기 때문에 특이하게 변형되었다.]


그림이 훼손되어 새로 그릴 때는 보관한 화본을 바탕으로 한다. 

옛 화본(畫本)을 바탕으로 새로운 화본을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변주가 발생한다. 

변주는 변화된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반영한다. 

여기에 화가의 능력, 물감이나 화지라는 미술재료의 발전, 창작기법의 발전, 재정지원 따위가 결합한다. 

그렇기에 시대 상황이 좋지 않고 천재적 화가가 없거나 재정지원이 따르지 않는 상황에서는 작품의 수준이 급격히 떨어지거나 퇴보하기도 한다.      


“옛 그림을 보니 화본에 의존해 습관적으로 그렸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나 또한 수십 점 이상의 모란그림을 그렸지만 정작 꽃의 모양이나 이파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했네.”     

[도화서 모란도는 실제 모란꽃과 다르다. 이런 형식으로 발전하기 까지 수많은 변주가 있었을 것이다.]

          

“모란은 군자의 상징이자 부귀를 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대부는 군자의 상징으로 여기지만 백성들은 부귀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다르게 수용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또한 백성들이 좋아하는 모란그림은 실제와 비슷한데, 도화서에서 그리는 모란그림은 도식적입니다. 그 연유가 뭔지도 알지 못합니다.”   

  

“조선 그림에서 모란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네. 선왕의 제사뿐만 아니라 모든 가례에 빠짐없이 사용하네. 죽음과 삶의 절정기를 통합하는 내용과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세. 

이번 정순왕후 가례는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일세. 

과거 모란그림을 배우고 교훈 삼아 새로운 그림을 창작하는 기회로 삼아보세.”  

   

“과연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조선 최고의 화원인 신한동일세. 조선 하늘 아래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없네.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흠흠, 아무리 그래도 자기 입으로 조선 하늘을 운운하다니...겸손은 조선 땅바닥이외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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