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나마 잘하는 일을 찾은 우연
무언가 만들고, 운영하는 걸 좋아했다.
그걸 사람들이 봐주는 것도 좋았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7살 때부터 게임하는 것에 대해 집에서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집안 사정이 풍요로운 편은 아니었음에도
구성원 한 명당 하나의 데스크톱이 있었을 정도로 가족 모두 게임을 좋아했다.
게임에 진심이었을까. 블로그에 게임 플레이 기록을 남기고, 도움될 만한 정보를 공유했다.
그렇게 포스팅을 올리다 보니 방문자 수라는 지표에 집착하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이 방문자 수를
높일 수 있을까 고민했고 많은 비교 테스트를 진행해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A/B테스트였다. 네이버 검색 결과에 어떻게 해야 높은 순위에
내 포스팅이 노출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소재, 문안, 원고 등을 계속 변경해 가면서 실험했다.
그렇게 내 블로그 방문자 수는 우상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내 최적화까지 되어 이제는 내가 뭘 올리든 검색결과 내 상위 노출이 잘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블로그 마케팅 업체한테 연락이 왔다.
블로그 팔라고..
그게 나의 첫 마케팅 관련 수익 활동이다.
이후에도 계속 여러 블로그를 운영하고, 카페도 운영하고, 짧지만 프리 게임 서버를 구축해
운영도 해봤다. 하다 못해 플래시 게임도 개발해보고, 게임 내에서 장사를 통해 다양한 현금 수익 창출 경험도 해보았다.
여기까지가 중학교 입학 전 이야기다.
이때 개발에 대해 더 딥하게 접근해서 개발자가 되었어야 했는데.
여담. 인생 최대 업적인 반장도 중학교 입학해서 해봤다.
반장하고 이틀 만에 울었던 기억도 있다.
중학생이 되고 얼마 안 되어서 페이스북이란 걸 접했다. 물론 아직 많이 사용하고 있진 않았고,
주변 친구들 몇 명만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 페이스북 피드는 무법지대와 같아서 선정적인 콘텐츠도 그대로 올라오는 경우가 꽤 많았는데,
콘텐츠와 함께 꼭 광고 링크가 함께 올라왔다. 궁금했다.
"혼자 보면 되는데 왜 굳이 힘들게 편집해서 올리고,
왜 저 링크는 꼭 함께 올리는 거지?"
남자들은 알 거다. 선정적인 콘텐츠에는 꼭 광고가 붙어있다.
궁금해서 포스팅 게시자한테 연락해 봤다. 그냥 물어보면 안 알려줄 것 같아서 유도 질문처럼 물어봤다.
"저기요, 왜 그거 올리세요 더 좋은 거 많은데?"
그랬더니 포스팅 게시자분이 링크 URL을 하나 보내주시면서, 자기는 여기서 이걸로 하는데 좋은데 또 어딨 냐고 답장을 주셨다.
링크 URL을 들어가 보니 회원 가입하면 URL을 하나 발급해 주는데, 그 URL에 클릭이나 가입 등이 발생할 때마다 나에게 일정 수준의 커미션 수익을 지급한다는 사이트였다. (CPA/CPC Affiliate Flatform)
발급 URL 랜딩 페이지는 처음 보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웹툰 사이트였는데,
나에게 링크 URL을 주신 분은 성인 웹툰들이 많다 보니 선정적인 콘텐츠와 함께 URL을 올리던 것이었다.
나도 똑같이 선정적인 콘텐츠를 구해서 편집하고, 발급받은 URL과 함께 페이스북 아무 곳에다가 올렸다.
글을 게시한 지 얼마 안 되어서 17만 원 정도 커미션이 발생한 것을 알았다.
당시에 용돈 개념도 없던 시절이고, 하루에 500원 받았던 것 같은데 17만 원은 좀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돈을 벌어서 좋다는 감정보다는 '이런 게 있었어?'라는 신선함에서 충격을 좀 받았던 것 같다.
근데 작지 않은 문제가 발생한 걸 또 금방 알게 되었다.
페이스북은 내가 올린 글을 내 친구 모두가 볼 수 있게 되어있는 구조란 걸 잘 몰랐다.
여자 사람 친구 몇 명한테 연락이 왔다. 그런 거 왜 올리냐고.
바로 게시한 글을 지우고 어떻게 하면 남들 몰래(?) 올려서 수익을 더 내볼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페이스북에는 '페이스북 페이지'라고 불리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채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하는 과정까지 왔다.
그런데 페이스북 페이지는 좋아요(팔로우, 구독)을 눌러준 사람들이 있어야만 글이 누군가에게
노출되다 보니 좋아요를 확보해야만 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비교적 쉬웠다.
블로그 키우면서 A/B테스트가 이미 몸에 배어있어서 이것저것 해보면서 정말 열심히 키웠다.
블로그랑 다르게 확산이나 노출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보니 금방 규모가 늘었다.
패션, 뷰티, 일상, 유머, 만화 등 정말 구분 없이 많은 페이지를 키웠다.
이때부터 주객이 전도되었던 것 같다. 분명 익명성을 앞세워 선정적인(?) 콘텐츠를 올리려고
대체재로 페이스북 페이지를 택한 것인데, 페이지 키우는 게 너무 재밌었다. 사람들 반응도 좋았다.
하다 못해 토요일 자정만 되면 휴지 사진만 달랑 한 장 올리는 병맛 콘셉트의 페이지도 만 단위 규모로 키웠었다.
채널을 운영해 본 대표님이나 담당자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채널의 규모를 건강하게 스케일 업하는 과정은
정말 많은 수작업과 같은 공수가 요구된다. 채널 규모도 늘어나고 키우는 채널의 개수도 수십 개가 넘어가니 더 이상은 직접 하는 것이 좀 힘들었다. 그래서 프로그램으로 자동화해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좀 해봤다.
그래서 매크로 프로그램을 어디서 구해와서 직접 좌표 설정하면서 매크로를 짜서 구현도 해봤다.
물론, 의도한 대로 잘 돌아갔으나 매크로 프로그램 특성상 동시 작업이 안되어서 더 나은 대체재를 찾기 시작했다. (매크로 프로그램 실행과 동시에 마우스, 키보드를 움직이면 안 됨, 다른 작업 불가)
그래서 매크로가 아닌 다른 방식의 자동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개발자를 찾았다.
당시 나는 선입견이 있어서 개발자는 가난하고 폐인 같이 후줄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찾는 허들이 낮았고, 더 무모하고 무례하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개발자분께 제안을 드렸다.
"제가 지금은 많은 비용을 드릴 수 없어서 이 정도 비용만 드리고, 만들어주시면 제가 영업해서 더 많이 비싸게 팔아오겠습니다. 잘 팔아올게요. 그리고 그 판매 수익 중 일부는 저도 나눠주세요"
팔아올 자신이 있었다. 나처럼 페이지를 많이 운영하고 키우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카페와 카톡방이 있었는데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채널을 수작업으로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잘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개발자분께서는 일단 제안을 승낙해 주셨고, 프로그램에 대한 기획을 어느 정도는 만들어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구글을 정말 많이 뒤졌다. 기획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때도 좀 고생했던 것 같다.
그렇게 프로그램이 금방 개발이 되어서 나왔고 내가 채널을 키우기 위해 들이던 공수에 상당 부분이 삭제되었다. 그리고 잘 작동하는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위에서 언급한 페이지를 운영하는 사람들한테 30만 원에 팔았다.
프로그램을 팔아올 때마다 수익의 50%를 RS구조처럼 쉐어 받았고 더 열심히 팔았다.
얼마 안 되어서 페이지를 운영하던 사람들 대다수가 이 프로그램을 사용했고, 복제 프로그램까지 나올 정도로 잘 팔렸다.
채널을 키우는 부분들을 자동화하면서, 나는 내가 가진 페이지의 수가 100개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수십만 좋아요(구독자)가 넘어가는 대형 페이지도 꽤 있었고, 채널을 운영하면서 광고 대행 문의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포스팅 발행 광고 같은 단건 업무부터 실제 마케팅 대행도 종종 들어왔다.
할 줄 몰라도 일단 돈 받고, 몸으로 부딪히면서 어떻게든 업무 결과물도 만들어 드리면서 대행의 대한 경험도 차곡차곡 쌓아갔다. 이때 처음으로 Affiliate Marketing 이 아닌 다른 마케팅 카테고리들도 경험하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어느덧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공부도 하면서 채널도 키우고, 광고 대행도 받고, 교복 입고 강의나 컨설팅 같은 것도 나가면서 나름 돈도 좀 벌었다. 학교에서도 업무 보는 것에 대해 배려해 주셔서 수업 시간에 노트북 펴고 일할 정도로 나름 편하게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불안함이 크게 엄습해 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 내가 돈을 이렇게 벌다가 페이스북이 망하면, 네이버가 망하면 난 그때는 뭘 할 수 있지?'
5년 뒤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버는 돈들은 주식, 게임들에 쏟아가면서 날리고 있었다 보니 막상 큰돈을 모은 것도 아니기에 5년 뒤에 대한 불안함이 크게 다가왔다.
아마 이 시기도 다들 대입을 준비하던 때이다 보니 더 크게 왔던 것 같다.
뒤늦게 대입을 준비했다. 미팅도 다니고,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새벽에 화상 과외도 받으면서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굉장히 비싼 과외였던 기억이 있다.
학교생활도 재밌었고, 일도 재밌다 보니 공부에 신경을 많이 못썼던 게 급 후회로 밀려왔다.
그렇게 대입 준비를 어느 정도 하다 보니 인 서울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인정해 주는 학교가 아니면 큰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고 싶었던 인 서울 중위권에 한 학교에만 상향 지원해 원서를 넣기로 결정했다.
남들 원서 최대한 많이 쓸 때 난 딱 한 곳에만 넣었다. 여기 아니면 안 가야지
그리고 보험을 위해 저 원서 하나가 떨어지면 건설 현장 용접공이 되기 위해서 용접을 전공할 수 있는 폴리텍 대학도 하나 넣었다. 그냥 전문 기술이 있으면 가족들 굶기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한 것 같다.
결과만 이야기하면, 운이 좋게 상향 지원한 '인 서울 중위권!' 학교에 예비 1번까지 붙었다.
그리고 그 1번이 안 빠져서 떨어졌다. 매년 넉넉히 빠지던 학과라서 당연히 붙었겠구나 했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다.
폴리텍은 당연히 붙었다. 큰 선택의 기로에 섰다. 진짜 '용접을 해야 하는가?'
선생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렸다.
오전까지만 수업 듣고 점심 이후에는 회사로 출근하면 안 되냐고.
용접을 막상 하려니까 무서웠다. 지금까지 내가 몇 년간 일을 해오던 모든 인사이트도 버려야 했고, 벌던 돈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용접사분들의 밴드(커뮤니티)를 가서 계속 보니까 일도 많이 없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내가 생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큰 용기를 내서, 지금까지 내가 마케팅 일한걸 다 내려놓고 정규적인 커리어를 만들어서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롱런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수입은 못 벌어도 직장인 월급에 몇 배를 벌었는데도 불안정한 상황들이 그려지는 게 너무 싫었던 것 같다.
내가 수년간 마케팅해 온 이력들을 포트폴리오와 인포그래픽으로 구성해서 이력서를 만들었다.
잡코리아 기본 이력서 템플릿은 쓰기가 싫어서 따로 일러스트레이터분에게 아웃 소싱해서 나만의 이력서를 만들었다.
이력서를 최대한 많이 넣었다.
감사하게도 면접 미팅이 정말 많이 잡혔다.
그러던 중 당시 내가 여기 브랜드 진짜 광고 잘 만드네, 하던 브랜드에서도 면접 제안을 주셨다.
너무 설렜다. 이런 광고를 하는 브랜드에서 일하면 정말 좋겠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면접을 보고 도출된 결론은 한 가지.
역량과 경험은 높게 사지만 현재 채용 건은 마케팅 리드의 퇴사 계획으로 결원에 의한 충원이기 때문에
팀을 리드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함께할 수 없다.
너무 속상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나름 마케팅 좀 했다 해도. 팀을 리드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냥 아무 광고 대행사를 들어갔다.
(선생님과 교장선생님께서 배려해 주셔서 오전에 학교에 출석 체크하고 바로 출근하실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렇게 내 첫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모든 게 낯설고 불편하고 어색했다. 프리랜서로 혼자서 모든 일을 오퍼레이팅 하던 때와 너무 달랐다.
조직 구성원 전체가 합의하고 따르는 규칙이 있었고, 문화가 있었다.
너무 힘들었다.
엑셀 수식도 하나도 모르고, 보고서도 정석적으로 쓰려니 감도 안 잡히고, 혼자 할 때는 내 스타일대로 했었는데 여기는 기획안을 올리고 컨펌이 되면 작업 지시서를 작성해서 협업 요청을 해야 했다.
모두가 따르는 규칙들이 너무 불편했다. 하루하루가 너무 지치고 고되었다.
맡은 업무들 조차 내가 당시에 알바한테 시켰을 정도로 낮게 평가했던, 속된 표현으로 잡무를 많이 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다.
월급을 받으니까 멘탈이 더 많이 깨졌었다.
실수령액 기준으로 150만 원 정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통장에 급여가 입금되었다는 알림을 받고 든 생각.
'내가 이거 받고 일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게 맞나?'
게임하고 놀면서 일해도 받은 급여에 몇 배를 벌었었는데 멘털이 많이 나갔다.
그럼에도 당시에 나에게 칭찬을 하고 싶었던 부분은 이 과정에서 이탈하지 않고,
버티자라는 독기를 품고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는 것.
그렇게 매일 출근하다가 어느 날 카톡을 하나 받았다.
내가 정말 가고 싶었던 브랜드의 마케팅 리드분께서 본인이 퇴사하고 새 회사에 창업 멤버로 합류했는데,
함께하자라는 연락이었다.
진짜 너무 좋았다. 비록 그 브랜드는 아니지만 그 광고와 마케팅을 전략 기획하던 리드 분과 함께할 수 있음에 너무 좋았다. 얼마나 내가 빠르게 성장할까라는 기대도 컸다.
이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합류하겠다고 연락을 드리고, 다니던 회사에 팀장님께 군대 문제를 언급하면서 퇴사를 공유드렸다. 모든 게 한두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벌어졌다.
그랬으면 안 됐지만, 무례했지만 저런 거짓말까지 하면서라도 설렜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물론 치기 어린 잘못된 행동이다.
그렇게 내가 지금까지 은사님이라고 불리는 리드님과 일하게 되었다.
당시 미미박스와 비투링크를 성공적으로 창업하고 세 번째 창업을 도전하는 대표님과
6개월 만에 100억 매출을 만든 마케팅 리드님, 블랭크 코퍼레이션 출신 각 분야 시니어분들과 함께 회사를 처음부터 꾸려가는 경험을 했다.
전문적으로 마케팅 컨설팅을 하는 일을 했고, 해당 경험을 바탕으로 브랜드를 만드는 일도 하게 되었다.
이때 각 분야에 능력 있는 시니어분들과 일하면서 영업, 제품 개발, 유통, 디자인, 마케팅, 운영 등 정말 모든 영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너무 재밌었고, 너무 힘들지만 매일 성장하는 게 체감되는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또한 내 돈과 엔젤 자금을 통해 PB브랜드를 제품 개발부터, 마케팅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해보는 경험도 해보고, 법인을 만들어 광고 대행과 컨설팅도 본격적으로 하기도 했다. 일 년에만 60개 정도의 고객사를 받았으니 소박하게 한 것 같진 않다. 물론 전부 직장생활과 병행하면서 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중학생 때부터 20살 때까지의 경험이다.
이후 대행사, 브랜드 인하우스, 플랫폼 운영사 등 마케터로 일할 수 있는 대부분에 카테고리에서 정말 많이 일했다. 사원으로 시작했지만 대리, 선임연구원, 과장, 팀장, 이사까지 순차적으로 다 밟아봤다.
그냥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독립해서 제대로 법인을 키우는 것도 고민했고, 규모가 큰 기업에 억대 연봉 오퍼를 고민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얼마나 성취감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상반되게 얼마나 불안정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인지도 깨달았다.
지금은 디어커스라는 Life Style Brand에서 CMO로 있다.
그리고 사내 창업을 통해 B2B SaaS Flatform PO로 겸직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회사라는 울타리에서 보호받고 있다.
불안정한 걸 싫어하면서도 성취감을 찾는 모순된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환경이다.
지금은 그렇게 마케팅과 사업 모두 함께하고 있다.
일이 너무 재밌고 간절해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3~4시에 퇴근을 하고
주말에는 늘 간이침대를 펴놓고 사무실에서 아침까지 밤새고 자고, 또 일한다.
이런 삶이 몇 년째 지속되고 있다.
몸은 너무 고되고 정신적으로도 부담과 스트레스가 너무 크지만 부정적인 요소를 한 번에 상쇄시킬 수 있는 성취감이 연속적으로 나오는 이런 삶이 매우 감사하고 소중하며, 만족스럽다.
마케팅을 안 했으면 경험하지 못했을 소중한 경험들이 너무 많다.
운이 좋아서 이 일을 시작했지만, 참 잘 골랐다.
*어법상 맞지 않는 문장이 있더라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너무 오래된 기억들이 많아 살짝 순서가 바뀌거나, 왜곡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번쯤 정리해서 공유하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