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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눗 Jun 07. 2021

마스크 벗기만을 기다리는 당신에게

모든 스토리에는 반전이 있어야 작품이다. 그렇다. 이 전시도 그랬다.

분명 아침에는 잿빛 구름에 비가 쏟아졌었는데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시치미를 떼며 쨍하게 해를 내놓았다. 좁은 스튜디오의 창문 밖으로 커다란 나무들과 풀들이 햇살에 너무 싱그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얼른 가방에 이것 저것 챙겨 집 밖으로 나섰다. 일 년 내내 여름인 싱가폴은 15분만 걸어도 금새 땀범벅이 되기 일쑤지만 사방에 널려 있는 (마치 정글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나무들과 에어컨 빵빵한 쇼핑몰들이 있으니 불평할 이유가 없다.


세상 맛있는 아이스 라떼를 만들 줄 아는 최애 카페에 가서 곱게 준비한 텀블러를 내밀었다. 힙한 직원이 싱긋 웃으며 "아이스 라떼지?"하곤 받아친다.

"응, 프로틴 볼 두개도 부탁해."

"오케이, 13.50달러야."

그렇게 '페이웨이브(카드나 폰을 기계에 간단히 접촉해서 컨텍리스로 계산하는 방식)'로 1초만에 계산이 끝났다.


텀블러와 테이크아웃 봉투를 달랑달랑 들고 광장으로 걸어 나와서 계단쪽에 털썩 앉았다. 그저 지나칠 때는 몰랐는데 앉아서 보니 꽤나 풍경이 에쁘다. 아침에 비가와서 그런지 후덥지근하긴해도 살랑살랑 바람이 분다.


한 커플이 자전거를 타며 지나갔다. 검정 썬글라스 사이로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땀을 훔쳐내는 여자를 보아하니 꽤나 먼 거리를 탄 것이겠지. 큰 도로에는 버스가 아주 느릿느릿 지나 가고, 광장 앞 건물 앞에는 하얀 셔츠를 입은 할아버지가 빌딩 문 앞 테이블에 앉아 QR 스캔과 체온 재는 것을 평온하게 지키고 있다. 두 세 사람들이 폰으로 건물 QR코드 스캔을 빠르게 마치고, 익숙하게 스탠드 체온계에 이마를 대고 지나 간다. "Normal temperature, Normal temperature"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늦을 새라 마스크를 바로잡아 코와 입을 온전히 덮었다. 익숙해질만도 한데, 아직까지도 그 장소의 공기의 채취나 바람의 냄새따위를 맡을 수 없는 게 아쉽다. 냄새도 기억과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는데 그저 모든 곳이 마스크의 화학용품냄새 뿐이니 그게 그렇게 안타깝다. 이유없이 뿌리고 나온 향수조차 분간하기가 어렵다. 총총 걸음으로 싱가폴 네셔널 뮤지엄으로 곧장 향했다.


'WAS I HERE'

뮤지엄 앞에 놓인 여덟 개의 글자가 의미 심장하다.

내가 여기에 있었던 걸까.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이곳에 있었던 지금의 나를 기억하려나. 떠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텐데 '기억'만이 오롯이 내가 이곳에 있었던 것을 증명하려나.


집에서 20분 거리인데도 이렇게 여기까지 걸어오는 게 어려웠다. 역사적 유물들을 그저 텅빈 공간에 늘어놓는 식의 수많은 박물관들의 경험 때문에 딱히 각국 국립박물관들은 내 여행 리스트에서 늘 뒷전이었다.


그러다 코로나 상황을 사진전으로 전시한다는 홍보 현수막이 꽤 눈에 띄었다. 지금이 그 시기인데, 시간이 지나고나면 그게 그렇게 특이할 수 없지 않겠나, 이미 익숙해진 이미지들을 어떻게 담아 냈으려나. 싱가포르가 얼마나 잘 대처하고 있는지 선전하는 그런 용도로 쓰인 건 아니려나. (사실 그들은 정말 잘하고 있다.)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지금있는 상황이 이미 우리에겐 익숙하니 별 감흥있을 만한 사진들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뭐 마스크 쓴 사람들의 모습이라던가 그런 것 따위가 있지 않겠냐며. 그러나, 모든 스토리에는 반전이 있어야 작품이다. 그렇다. 이 전시도 그랬다.


내 눈이 머물렀던 첫 작품은, 집에서 요가를 하는 사람을 삼각대에 설치한 아이폰으로 촬영하는 걸 아웃포커싱해서 찍은 사진인데 그 한 장에 놀랍게도 지금의 우리 일상의 모든 이야기가 다 담겨있었다. 갈 곳 없어 익숙해진 홈트나 요가, 그리고 2-3배는 늘어난 유튜브와 넷플릭스 등의 폰 영상의 시청시간. 질 좋은 폰 카메라로 찍어내는 '집'에서의 생활. 너무나도 쉽게 방영되는 일상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와 모습들.


이를 시작으로 전시는 점차 강도 높은 디테일들을 '사람' 중심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현재의 '영웅(Hero)'이란 제목으로 여러 직업을 가진 인물들을 현장에서 정면 촬영한 사진들이 나열했던 작품은,  그들의 손글씨로 직접 쓰인 자신의 소개서(?)가 같이 전시되어 있었다. 어떤 환경미화원은 이 국가가 얼마나 철저하게 방역을 지켜주는지와 자신이 얼마나 안전함을 느끼는지에 대해 칭송을 하는 글을 쓰는 반면, 어떤 이벤트 장소를 관리하는 듯한 여성은 10명도 모일 수 없는 상황에서 얼마나 힘들게 그 일을 이어가고 있는지 쓰기도 했다. 음압병동에서 활동하는 물리치료사의 눈빛에서는 사명감같은 무언가가 어려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저 왼쪽 중앙의 분이 물리치료사.



쭈욱 사진들을 훑어보다 어떤 야무져보이는 아주머니가 내가 좋아하는 아보카도 소이주스를 양손에 들고 서있는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어떤 할아버지가 양손 가득 도시락 박스들을 칭칭 감아 들고 있는 사진. 싱가폴에는 '호커센터'라고 불리는 야외 푸드코트가 도시 곳곳에 자리잡아서 서민들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데 락다운 동안에는 배달이나 테이크아웃밖에 할 수가 없었다. 팬더믹 상황에서 야외 테이블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고 여기저기 접근금지 끈으로 칭칭 묶어놓은 사진들과 어떻게서든 생계를 이어나가는 음식점 주인들이 함께 보여지니 점차 '그들의 삶'에 대한 고민이 내 마음으로 문득 스며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점차 클라이막스로 치달아올랐다. 한 중년 남성은 말레이시아에 가족들을 두고 싱가폴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가는데, 갑작스레 여행이 불가능한 상황이 닥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기가 어려워졌다. 가족과 생이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거다. 그의 직업도 마땅치 않아 그는 홈리스(homeless)가 되어 정부에서 제공해주는 임시 거처장소같은 1평 남짓 안되어 보이는 좁은 방에 놓인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래도 이렇게 지붕있는 집에서 잠을 잘 수 있음에 감사하단다. 아무 것도 없어보이는 방에 놓은 조금 낡아보이는 침대가 더욱이 눈에 돋보이는 걸 왜였을까.


한 노인은 먼저 떠나간 부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아파트에 자식들도 없이 홀로 남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누구도 만날 수 없고, 방문해줄 사람도 없는 그는 '외로움'이 다른 무엇보다 더 큰 고민이었을테지. 어떤 홀로 사는 여인은 음식을 전해주러온 자원봉사자의 방문에 현관문을 열었다가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두손으로 눈을 가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 대학생 청년은 가난한 이들의 식사를 위해 뜨거운 불판 앞에서 누들을 열심히 볶고 있다. 새벽 다섯시마다 그렇게 나와서 한단다.


전시장의 기승전결이 다 끝나고 밖으로 걸어나오는데 한 가족이 자전거를 타고 건물을 앞을 지나갔다.

WAS I HERE.


이 길고 긴 팬더믹 상황이 '기억'으로만 남게되는 날이 과연 오게 될까. 언제 여기 있었냐는 듯이, 우리가 그랬었었지하며 '역사'의 한 줄 문장으로 남겨질 날이 언제 되겠는가. 생계, 생사, 외로움, 굶주림이라는 단어들이 함께 엮여져버리니 그들의 고통 앞에서 숙연해졌다. 그저 먼발치에 서서 "힘들겠다", "견디라"라는 말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문제들과 아픔들이라 어떻게 해야할지 방도조자 찾아내기가 어려운 기분이었다.


한국에 다녀오자마자 두번째 락다운이 시작되면서 집에서 갇혀 일만 해야하는 상황이 왔다. 삶의 허무감과 각종 '마음의 소리'들에 다양한 의문을 끊임없이 해댔었는데, 그런 심적 고통은 '삶의 직접적 고통'을 겪는 이들앞에서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일개의 찌끄러기 같이 느껴졌다. 도대체 이 무슨 불평을 하고 있었는 것인가. 새벽 다섯시마다 누들을 볶는 그 대학생 옆에서 손을 거들어주는 편이 홀로 인생을 운운하는 것보다 가치있겠다.


자전거를 타던 그 가족이 신호등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 바구니에 담아둔 물을 아들에게 건낸다. 당연하듯 받아들고 마신 후 아빠에게 건낸다. 빨간 불이 금새 초록 색으로 변하자 그곳을 금새 떠났다. 언제 그랬냐듯 아무도 없이 텅비어버렸고, 마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건물만 햇빛에 비쳐 반짝였다.


WAS I HERE.

WERE WE HERE.

모든 것이 그렇듯 다 지나갈 거다. 이 시기를 잘 이겨내고, 아픔과 고통을 배움으로 승화해서 우리는 또 그렇게 살아나게 될거다.


언제 그랬냐며 이 고통들이 역사의 한 구석으로 지나가길 바라는 듯 그날의 토요일의 하루가 저물어갔다.



문이 굳게 닫힌 쇼핑 거리를 걷는 아저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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