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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눗 May 09. 2020

이동제한 조치와 서른 넘은 이별

집에서만 머무는 삶을 배우는 것과 이별이 주는 감정들의 이야기

처음 싱가포르가 봉쇄된다는 발표를 들었을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제 한 주 뒤부터는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사는 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절대 만날 수 없고, 슈퍼마켓 및 레스토랑, 카페에서 음식을 테이크아웃만 할 수 있다는 이동제한 조치였다. 회사 메신저에서 정부 발표 PDF가 여러차례 공유되었고, 몇몇 동료들이 홀홀단신인 나를 걱정하며 눈물을 또르르 흘리는 이모티콘과 함께 괜찮냐고 물어왔다.


걱정해주는 이들이 있는 것에 대해 고마웠고, 그저 카페에서 아이스 라떼를 테이크아웃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을 뿐이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재택을 마친 후 친구와 예쁘장한 차임스 주변을 오랫도록 걸었고, 나는 내가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하얗고 깨끗한 내 방 벽면이 나를 향해 좁혀오다가 나를 짖누를 것 같다는 감정을 느꼈다. 내가 이 방에 갖혀 더이상 꼼짝할 수 없다는 불안이 스믈스믈 내 정신을 지배하려는 낌새를 보이는 게 아닌가. 마치 숨을 제대로 쉬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내가 이 5평이 족히 안되보이는 작은 감옥에 갇히는 상황에 치달았다는 생각에 들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럴 때는 피할 길을 만들어 둬야지. 정말 안될 것 같으면 가족들이 있는 한국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내 마음을 다독였다. 따뜻한 손바닥으로 가슴을 어루어 만지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새벽 세 시에야 잠에 들었고, 무슨 꿈인지는 알 수 없는 쫓기는 듯한 기분으로 새벽 여섯 시에 잠에서 깼다. 불안은 증폭되어 걷잡을 수 없었고, 나는 길고 긴 카톡을 써서 거의 구조를 요청하는 심정으로 두 명 정도의 친한 동생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스르륵 잠에 들었던가, 깨어보니 길게 답들이 와있다. 지금 당장 오라며, 걱정하지 말고 언제든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서 같이 있어도 되고 머물고 싶으면 며칠이고 머물어도 된다고.


신기하게도 그들의 답들은 큰 안정제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그렇게 안정된 마음으로 백년만에 부모님과의 영상통화도 길게 했다. 늘 생기발랄하고 애교많은 엄마랑 묵직한 아빠와 길게 통화하고 나니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을 만큼 괜찮아져 있었다. 이래서 가족이란 게 필요한 거야. 삶에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적어도 나의 생사와 안위를 생각해줄 수 있는 그런 깊은 관계가 우리에겐 필요한거라고. 


1과 2사이의 간격은 상상 외로 깊고 넓었다. 1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자유로움과 꽤 즐길만한 고독은 이 락다운 상황에서는 바닥에 완전히 내동댕이 쳐졌고, 2가 가질 특권만이 아쉬울 뿐이었다. 물질적으로는 같은 1일지라도 자유로울 수 있어서 스스로 1이 되는 것과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강제로 1이 되는 것의 차이는 너무나도 극명하다. 같은 아메리카노라도 아아와 뜨아가 완벽하게 다른 것 처럼.


그러던 중 새벽 구조요청에 응해준 친한 동생 중 한 명이 일주일 쯔음 뒤에 거실이 있는 자신의 집 키를 건네주고 한국으로 들어갔다. 감지덕지하는 마음으로 피신하듯이 들어간 그 집에서 '집에서만 머무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깨끗하고 훤한 거실에 큰 TV와 쇼파가 놓여져 있는 환경이 집콕삶에서 필수라는 걸 왜 서른이 훌쩍 넘어 서야 알았을까. TV에 랩탑을 연결해서 요가 동영상을 틀어놓고, 그 앞에 요가매트를 깔곤 이리 저리 뒹굴어도 한참 공간이 남았다. 


괜히 기분이 나지 않는 날은 싱싱한 비트와 사과를 사와서 블랜더에 갈아 활력적인 붉은 색 과일 주스를 만들었고, 힐링이 필요할 때는 케일과 바나나에 아몬드 우유를 넣고 갈아서 초록 색 건강 주스를 마셨다. 밥 사먹기 싫은 날엔 닭가슴살과 당근, 양배추를 치킨 스톡이라는 마법 큐브를 넣어 끓이면 훌륭한 한끼 든든 스튜같은 스프가 되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점심 스텐드업 화상미팅을 마치면 얼른 몰에 가서 커다란 개인 텀블러에 아이스 라떼를 테이크아웃해왔다. 오후 내내 정신없는 화상 회의들을 마치고 나면 잠깐 쇼파에 앉아 시원한 라떼를 마시며 십분 가량 쉬기 딱 좋았다.  


삼십년이 넘도록 내게 집은 그저 밤에 들어와 음악과 향초 켜놓고 잠에 드는 곳이었는데, 어느 새 '삶'의 공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집은 단순히 잠깐 육체가 머물며 쉬는 곳이 아니라 내 삶의 달콤한 분위기와 회복을 만들어주는 공간이었다. 카페가 좋아서 늘 밖을 나돌며 유랑하듯이 이 곳 저 곳을 머물곤 했었는데, 집은 카페가 줄 수 없는 사적인 편안함을 형성해주는 어떤 힘이 있었다. 


이렇게 혼자만의 공간을 가득 채워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종종 2었으면 더 좋았을 상황을 문득 상상해보곤 했다. 건강 주스도, 건강 수프도 같이 먹을 수 있고, 마리나 베이도 같이 걸어 다닐 수 있는 2의 상황 말이다. 그럴 때마다 뭔가 찡한 게 가슴을 뚫고 나왔다. 느리게 이별같지 않은 이별을 한 그와 함께여서 좋았던 순간들이, 그 독일의 추웠던 크리스마스 마켓이, 예쁜 소도시를 같이 걸어다녔던 시간들이 한 밤 중에 음악을 듣다가 터져나오곤 했다. 사무치도록 좋은 기억이 많은 사람과의 서른 넘어 하는 이별은 의외의 이유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보고 싶은 것도 맞긴한 것 같은데, 실상 잘 들여다보면 마음 아픈 것의 뿌리는 이 좋은 기억들이 사라져 버릴 것에 대한 속상함에 있었다. 늘 그랬듯이 그 사람과 내가 걸었던 순간 중에서, 그 장소만 남고, 그는 내 기억에서 사라져버려 결국 그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던 사람인지 어떤 표정으로 무슨 행동을 했었는지 흔적도 없이 흩어지는 것. 그게 슬펐다. 한 오 년 쯤 지나면 기억조차 남지 않겠지. 


그렇게 이동조치 제한이 한 달 즈음이 지나기도 채 전에 갑자기 싱가포르 정부에서 한 달 더 락다운을 연장시킨다는 것을 발표했다. 아무리 집에서 머무는 삶이 조금씩 익숙해졌다고 해서 이 강제적인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희석되는건 아니었다. 인간을 제대로 마주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게 가상으로만 가능한 현실을 한 달이나 더 지속시켜야 한다는 말이 감옥 수감 생활이 연장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렇게 발표가 난지 한주가 지날 즈음 난 결국 한국행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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