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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눗 Apr 24. 2020

느리고 천천히 헤어지는 것의 묘미

헤어지고서도 우리는 두달 간을 만났다. 

브런치에 일기쓰는 거 아니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에라 그러다간 글 한자도 못쓰고 인생 끝날 거 같아서 남기기로. (권태기로 헤어짐을 맞이한 어느 여자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지며...)


언제 헤어지기로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체감시간은 얼마되지 않은 거 같은데 아마도 현실의 시간은 많이 지나갔나보다. 한달 반 정도 된걸까. 


우리는 매우 느리고 천천히 헤어졌다. 헤어지기로 한 날은 서로가 울고 있었고, 나는 곧이어 신세한탄같은 소리를 쏟아내며 질질 짜면서 '왜'라는 질문을 계속 했던 것 같다. 이제야 생각한 거지만 헤어지는 마음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아니라는 생각과 감정이 든 것 뿐이겠지. 계속되는 나의 극심한 투정에 그는 머리를 움켜잡고는 잠시 바람을 쐬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찌글찌글하게 인연이 끝나는 건 싫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우리는 다시 만나서 평소처럼 긴 대화를 나눴다. 서로가 그동안 무슨 생각이었고, 헤어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 것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사실 별 생각이 안난다. 


우리는 그러고 서도 계속 만났다. 나는 일주일 만에 내가 머물던 그의 동네에서 40분은 족히 떨어진 곳(싱가포르로 치면 먼 편에 속한다)으로 원룸을 새로 계약해서 이사를 떠났지만, 그 이후에도 우리는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며 연락을 했다. 



그날 마신 모흿또

사랑표 따위만 없앴을 뿐이지, 우리가 쓰는 우리만의 언어들로 여전히 낄낄거리며 카톡을 주고 받았다. 그만의 개그방식에 나는 빵터졌고, 나만의 개그방식에 그는 까무러치며 하하 거렸다. 멀리서 카톡을 주고 받는 데도 그의 퐈하 하고 터지는 웃음을 나는 상상할 수 있었다. 


이게 헤어진 건지 만건지를 모르겠다 싶다가도, 문득 수긍하는 구석들이 생기면 괜히 마음이 뜨아해지는 적은 몇번 있었다. 왠지 애매한 관계의 상황때문에 희망을 갖곤 했지만, 결국은 그게 아니라 팬더믹 상황이 우리를 조금 더 배려있게 해준 거라는 결론을 냈다. 둘다 먼 이국에서 홀로 방에 갇혀 지내야 하는 이 락다운 생활과 이별이 겹치는 게 생각보다 좋지 못하다고 생각한 거겠지.


우리는 종종 만나서 마리나베이부터 그 호수인지 바다인지 모르는 그 곳을 한 바퀴를 다 돌곤 했다. 김밥을 사와서 벤치같은 곳에 앉아 함께 먹었으며, 모히토를 마시며 서로의 삶에 대해 평소처럼 대화를 나눴다. 





이스트 코스트부터 거의 창이 공항 근처까지 걸으면서 앞으로의 진로나 일에 대한 진지로운 긴 논의를 하기도 했고, 나이 많은 내가 이것 저것 내 경험치를 흘려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 그리고 진로에 대한 굉장한 고민에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내고 있었다. 딱히 연인이라는 존재가 끼어들 자리가 없어보였다. 심통날만 한데 별로 아무렇지 않았던 나는 그저 이래저래 훈수두며 조언아닌 조언들을 줄줄 늘어놓기만 했다. 


내 심장 한 켠에는 '임마, 결국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들어서는 서로를 보듬어주고 삶을 함께 살아갈 누군가 필요한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가족을 만드는 거라고.' 라는 숨겨진 말들이 솜뭉치처럼 얽혀있었다. 뱉어내지 못했다. 그건 시간이 지나고 삶을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어떤 것이지 누가 가르쳐줘서 들어먹힐 말이 아닌거다. 




함께 걸으면서 찍은 마리나 베이



헤어짐을 이끌어낸 건 나였는데, 헤어짐을 당한 측은 아이러니하게 나였다. 그는 그냥 고요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성격 상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아주 일년이고 더 걸려서 헤어졌을 수도 있었을 거다. 헤어지고서 내가 나 보고싶냐는 둥, 감정이 어떠냐는 둥 마음을 떠보면 그의 답은 늘 같았다. 너무 조용해졌고(당연하지 내가 맨날 쫑알쫑알 떠들어댔으니) 뭔가 비어있는 기분이고 종종 우리의 사진을 보면서 좋은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울기도 했다고 한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럼 왜 헤어져라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목젖까지 쳐올라오다가도 억지로 꿀꺽 삼켰다. 그는 제대로 사랑해줘야하는데 그만큼 못 사랑해줄 거 같다고 헤어지자고 했었다. 충분히 사랑하는 거 같지 않다는 그런 (헛)소리를 했다. 연애 경험이 다분한 베프가 듣더니 백퍼 권태기라는 진단을 내려줬다. 당장 팍 끊고나면 한달에서 세달 사이엔 연락이 반드시 온단다. 젠장, 그런데 나는 헤어지고서도 거진 두달간 계속 연락하고 종종 만나기 까지 했다는 말이다! 


퀘스트를 다 깨버리고 나서 더이상 흥미 떨어져 삭제해버린 게임 같은 꼴이 벌써 되버린 건가. 


데이트아닌 데이트같았던 그 날의 끝장나는 밤풍경


그래도 혼자와 둘의 사이인 시간이 두달 정도 있다보니, 마음을 정리하기엔 딱 좋았다. 혼자 방에서 주황색의 은은한 불빛과 양키캔들 하나 켜놓고 조용하나 빗소기라 같이 들리는 재즈음악을 낮게 틀어놓으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창밖에는 예쁜 나무들이 밤 불빛에 부딪혀 조용하게 사부작사부작 거리고, 꽤 히스토리있는 건물이 운좋게 창밖 풍경으로 떡하니 자리잡고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나혼자 즐기는 조용한 저녁 그리고 조용한 밤의 명상같은 시간들. 


그는 이제 싱가포르를 떠났다. 그는 역시나 떠나는 날에도 종알종알 나에게 카톡을 하며 수다를 떨었고, 나는 느릿 느릿 답하다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대로 그에게 가족을 만나면 안부를 전해주고 앞으로 잘지내라는 의미심장한 마무리 선을 조심히 그었다. 그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우린 그렇게 서로 그런 축복같은 말들을 꽤 여러 번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그의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지금의 나는 그가 너무 궁금하다. 이제 벨기에로 돌아가면 2주간 꼼짝말고 집안에 갇혀 살아야 할텐데, 잘 견디고 있을지 간만에 만난 가족들은 어떤지 별게 다 궁금하다. 영상통화라도 해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내 이성은 제발좀 정신차리라며 나를 말릴 친구를 찾아 그들에게 대신 연락을 했다. 런던에 사는 한 친구는 아무래도 참아야 할 것 같다며, 그냥 참으라며 그랬고, 서울사는 친구는 연락을 하지 말고 혼자만의 시간을 좀 주라고 그랬다. 다 같은 말이다. 


느리게 헤어져서 크게 아프지가 않다. 스트레칭을 계속 해줘서 느슨해진 근육처럼 뭔가 격심한 운동을 한 상황이 와도 고통스럽지 않고 그저 느긋해져있었다. 그는 그의 자리에서 잘 살고 있을 거다. 지금의 내가 이렇게 나의 상황을 잘 받아들이며 조용히 글을 쓰는 것처럼. 


그저 우리의 사계절이 다 담긴 그 추억들이, 바람만 스쳐도 기억날 것 같은 그 순간들이 흐뭇하게 그리울 뿐이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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