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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눗 Jun 10. 2022

그냥 왔다 시드니

번아웃을 맞이한 자들에게 여행의 의미

PART 1  |  갑자기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

4일 후에 출발하는 시드니행 비행기


심하게 말하면 조금 미칠 것 같았다. 거대한 도시에 갖혀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간은 느린 척 하면서 순식간에 지나갔고, 벌써 싱가포르살이 3년 차를 코 앞에 두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복지에, 좋은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회사에서 도대체 왜, 왜, 왜  왜 때문에 지쳤다는 건지 나조차도 나를 알 길이 없었다. 서점에 가서 분풀이(?) 겸 마구잡이로 사들인 책들은 죄다 '피곤'과 '스트레스', '아무래도 너 누구랑 얘기 좀 해봐야겠다(Maybe you should talk to someone)' 등의 제목들이었다. 그리고 킨포크의 'Travel' 모음집까지. 책 제목들을 보아하니 슬슬 답이 나왔다. 



최근 감정적 소진(Emotional Exhaustion) 이라는 단어는 지금의 나를 정확히 대변했다. 특이한 건 누군가 나를 괴롭힌 적도 없는데 혼자서 지쳐버렸다는 점이었다. 끝없는 일이 공장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에자일(Agile) 방식으로 운영되는 테크(Tech) 분야에서 일하면서 내 영혼을 갈아넣은 것 같다. 사랑해 마지않는 아이스 라떼를 사놓고도 한 모금 마시는 것조차 잊어버려 얼음이 다 녹아버릴 정도로 집중해서 8시간 씩 일하고 나면 나는 거의 '멍'한 상태로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쉴새없이 연달아 있는 회의들, 쌓여있는 업무들, 맥북 키보드의 검정색 부분이 다 벗겨져 빛이 새어나올만큼 우다다다 일만 했다.


그리고 K.O.



월요일, 화요일 연달아서 공휴일인 주간을 바로 며칠 앞두고 나는 매니저와 긴밀한 대화를 나눴다. 

"나 요즘 이유없이 그냥 지치고 힘들어. 피곤하다는 생각밖에 안들어. 유럽에서의 긴 여행을 떠났던 때가 계속 생각나고 몹시 그리워." 


긴밀하다기보다 신세 한탄이었다. 떠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예고편을 날린 셈이다. 떠나고 싶은데 떠날 것을 준비할 힘조차 없다. 회사를 마치고 나면 기진맥진해서 집에 와서 침대와 물아일체가 되는 게 일상이고, 회사를 마친 후에 또 활활 불타는 것 같은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을 용기도 없었다. 매니저는 지혜로운 조언들을 줄줄이 내놓으면서 결국 '안식년(Sabbatical leave)'같은 대안도 있다는 것까지도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휴가도 충분히 많이 쓰라며.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떠나기 불과 3-4일도 채 남기지 않고 시드니행 비행기표를 결제했다. 싱가포리언들 죄다 시드니행을 가는 건지 비행기표값이 고속으로 치솟고 있었지만 그냥 대뜸 내질렀다(760싱달러...). 그리고 수,목,금요일 몽땅 휴가를 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시드니하면 모두가 떠오르는 오페라 하우스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호주가 그렇게 '커피'천국이란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모든 커피가 모여있다며. 오페라 하우스는 관심이 없는데, 카페 투어를 하면서 주변의 자연을 느릿느릿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구미가 솟구쳤다. 표를 사고나니 다들 '멜버른'을 가지 왜 시드니를 가냐며 호통을 치긴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가볼만한 추천지들을 몽땅 구글맵에 저장해놓고 딱히 갈 곳을 정해두지 않았다. 내 목표는 '떠나는' 것이었으니 그것만으로 만족이었다. 


비자 신청이 필요한 건지 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게 쓰인 "You may apply...(신청을 해야할수도...)" 라는 호주 공식 홈페이지 공지글  덕분에 비행기 타기 5시간 전에 ETA 비자를 샀다(?신청이 아니라 20달러 주고 그냥 사는 기분이었다). 거의 '안되면 말고' 마음가짐을 가지니 별로 급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새벽 2시 비행기를 위해 공항에 도착했고, 순적히 시드니에 도착했다. 햇살이 온순하게 온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PART 2  |  에어비앤비에 도착하고 

사랑했던 장소와의 관계 그리고 그리움


호주는 한국의 날씨와 정 반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도착해보니 초가을 날씨였다. 서늘한 바람이 더운 기운을 휩쓸어가고 있었고 하늘이 파랗고 예뻤다. 해가 내 눈높이와 좀 더 가까운 지점에서 쨍하고 빛나는 느낌이었고 그제야 왜 사람들이 다들 썬글라스를 끼고 다니는지 알겠더라. 


싱가폴의 더운 기운이 싹 사라지고 선선하고 청량한 바람이 부니 내 마음이 살랑살랑 거렸다. 입에서 미소가 실실 나오는게 그치질 않았다. (진짜 실실 대고 계속 혼자 웃으면서 혼잣말 하면서 다녔다.)


그렇게 도착한 에어비앤비는 마치 운명처럼 내가 머물렀던 유럽의 그 시골도시의 집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쌀쌀한데 기분좋은 공기의 온도와 나무냄새, 사람이 사는 그 온기, 크진 않지만 너무나도 예쁘게 잘 꾸며놓은 리빙룸과 널찍하고 아늑한 부엌. 가족들이 모두 모여 기분 좋은 식사를 나누기에 충분한 빛이 드는 테라스와 작은 가든. 내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곳부터 방까지 깔린 보송보송한 카펫과 작지만 빈티지한 가구로 잘 꾸며놓은 방까지. 내가 하도 유럽타령을 해서 그랬나 신이 내게 그 때의 기억들을 모두 재생시킬 작정으로 이곳에 보낸 게 틀림없었다. 


남의 집을 이렇게 공개해도 될런지 모르겠지만 너무 예쁘니까... (도용절대금지)


도착하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조용하게 들리는 새소리와 바깥의 나무, 멀리서 들려오는 옆집의 그릇소리들이 모두 꿈같이 좋았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기어이 꺼이꺼이 울었다.


그동안 제대로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던 나의 잃어버린 순간과 장소를 그제서야 애도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떤 특정한' 그 곳을, 그 곳에서 느꼈던 모든 감정과 감각들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한다는 생각에 사실 그동안 슬펐었나보다. 그 여유로움과 자연이 주었던 위안과 평안을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읽고 있었던 Single on purpose라는 책에서 테라피스트 John Kim은 관계의 끝을 '상실(loss)'로 표현한다. 상실 이후에는 충분히 '애도 혹은 애통해하는(grieving)' 자신을 인정해주는 시간을 가져야하다고 한단다. 그런데 대부분은 충분히 애도하는 시간을 갖지 않고 그저 빠르게 '잊어'버리려고(moving on) 한다고


내 경우에는 특정 장소(유럽)와의 관계에서 깊은 애정과 사랑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걸 상실해버린 것에 대한 슬픔이 컸었던 거다이를 알리가 없었던 나는 이유 없이 계속해서 슬퍼하며 그리워하고 있었고 그런 나를 이해하질 못했다. 남들은 다 괜찮은데 '왜' 나는 그렇지 못한가에 대한 질책으로 비정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장소와 행복했던 기억들이 강하게 얽혀있다보니 그리울 수 밖에 없었던 건데. 



싱가포르 또한 너무 아름답고 내게 큰 기회를 준 감지덕지한 나라임에도 배은망덕한 내 뇌는 싱가포르를 팬데믹과 봉쇄, 고립이라는 단어들과 긴밀하게 연결시켜버렸다.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잘 가꾸어진 마리나 베이라던가 어딜가도 볼 수 있는 예쁜 나무라던가 리조트에 살고 있는 착각이 들게 하는 예쁜 콘도, 이런 아름다운 것들은 내 눈에서 가리워져 있었다. 그렇다고 친절하고 배려심도 깊은데 똑똑하기까지한 동료들, 내가 좋아해 마지 않는 디자인 일들, 잘 보장된 주말들을 포기하기하고 훌쩍 또 떠나기에는 스스로가 양심이 없다고 느꼈다. 스스로 힘든지도 모른 채 나의 100%를 일에 쏟고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극심한 번아웃으로 돌아오자 그제야 나를 돌아보기 시작한 거다. 



  


PART 3  |  번아웃러들에게 여행은

네 삶에 쉼이 있어도 괜찮아


며칠 간 구글맵에 평점좋은 카페랑 가볼만한 곳을 몽-땅 저장을 해놓고 3-4곳의 가까운 장소들을 연결해서 대충 (마음으로) 계획을 짜두었다. 그날 아침에 기분이 내키는 곳으로 갈 심산이었다. 정처없이 거리를 걸어다니고 싶었다. 마침 해도 쨍쨍하고 아름다웠고 가을이 올랑말랑 하는 기분 좋은 날씨 덕에 걷다 힘들면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멍 때리기에도 딱이었다. 




내게 익숙했던 곳을 떠나 탁 트인 아름다운 곳들을 걸으니 모든 것이 나를 위로하는 기분이었다(살짝 슬럼가 같은 그늘지고 축축한 거리들은 빼고). 혼자서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생각들을 우르르 쏟아냈다. 곱씹어보고 돌아볼 것들도 많았고 상상하며 기대할 것들이 넘쳐났다. 사람들 말마따나 나랑 하는 데이트가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생각을 해도 해도 부족한 이 때에 일주일 내내 혼자 생각하며 예쁜 곳들을 걸어다닐 수 있으니 지친 내겐 최고의 선물이었다. 


지나가다가 보이는 예쁜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Tired as F*ck"을 읽었다. 책의 저서는 나보다 더 심하게 10년 넘게 번아웃을 경험한 고단수였다. 그녀는 책의 절반 내내 번아웃에 시달리던 시간들이 얼마나 엿같았는지 모든 열정을 다해 욕하고 있었다. 박수치며 공감할만한 부분들은 많았는데 내 감정 추스리기에도 지쳐있는 상태에서 작가의 감정들을 설사하듯 읽어가려니 기운이 쭉쭉 빨렸다. 곱게 책을 덮어 테이블에 놓고 (왠지 책제목이 너무 커서 "나 번아웃이오"하고 광고하는 것 같아서 살포시 뒤집어 두고)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들이켰다. 요새 이런 번아웃러들의 책이 우르르 쏟아져나오고 금새 베스트셀러가 되는 걸 보면, 이것도 하나의 시대적 증상이 아닌가. 


사실 번아웃이 이런 여행 한 방으로 확 낫지는 않는다. 회복을 하려면 꽤나 길게 시간이 필요하고 나를 추스릴 충분한 여유를 줘야하더라. 그 여유가 필요한 것을 깨닫기까지 너무 시간을 지체해버리면 상태는 더 심각해진다. 그래서 이런 느린 여행으로 내게 생각할 시간, 쉴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은 굉장히 좋은 시작점이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정말 내가 원하는 건 뭐고 원하지 않는 건 뭔지 하나씩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손으로도 적어가다보면 어느 새 정리가 된다. 


여행은 그저 장소를 떠돌며 구경하는 행위가 아니다. 번아웃의 여행은 내게 쉼이 있어도 괜찮다고 알리는 시작 종소리와 같다. 늘 '효율성과 생산성'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당신이 기계처럼 굴러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릿느릿 걸으며 조용히 풍경을 바라보면서 살아도 괜찮다고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시작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드니는 10점 만 점에 10점이었다. 시드니에도 존재하는 바쁜 생활이 돌아가는 중심가 - 높은 빌딩가 - 를 벗어나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로 올라가서 멀리 보이는 작고 귀여운 집들과 나무들을 구경하노라면 정말 번아웃을 이미 벗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니. 


그리고 시드니에 단 하루만 머물러야 한다면 반드시 가야하는 곳은 "Bondi beach", (곳에서 살짝의 천국을 맛보았기에.) 경고하기를 그 곳에서 당신은 내가 과연 번아웃이었나 싶을 정도로 싸-악 잊어버리는 놀라운 여행길을 걷게 될거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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