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흐눗 Oct 11. 2022

"잘 지내?" 한 마디의 파장

프라하의 예쁜 풍경을 방해한 1년만에 온 전남친의 연락 극복기

#1. 나는 온전히 행복했었다.


내적으로 부족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 나이 서른 일곱이지만 질질 끌던 오랜 연애와의 연락을 끝낸 후 1년 간 나는 자유로웠다. 일하는 동안에는 번아웃을 겪느라 새로운 인연 따위엔 신경쓸 새가 없었고, 그 후 퇴사와 함께 작정했던 유럽여행을 오기까지 나는 정말 충만했다. 부족할 게 없었고 필요한 이도 없었다. 좋은 추억 속에 살아있던 그 유럽의 가을을 다시 만끽하면서 눈물날만큼 좋다고 생각했다.


퇴사 후 한국에서 재회한 친한 친구들 대부분은 혼자 여행다니고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네가 부럽다며 결혼한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고뇌를 털어놓기도 했다. 일종의 위로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 나는 진심으로 동감했다. 몇몇의 지인은 질새라 내 미래 남편을 위해 복을 빌어주며 얼마나 지금이 시급한 때인지 날 계몽시키려 했지만 (그들에게 미안한 소리이나) 귓등에도 들어오질 않았다. 정말 집중해서 그들의 말에 굉장히 귀를 기울이려 해봤지만 그러기에 당시의 나는 그저 행복했다. 종종 서른 중반을 이제 넘으면 소개팅이나 선자리도 어렵다는 사실을 돌아돌아 들어도 그게 내게는 중요한 주제가 되질 못했다. 내가 너무 해외에서 나이를 잊고 살아서 그런가, 아니면 해외나이가 2를 뺀 숫자인 서른 다섯이라 그런가. 


그래도 내심 마음 한켠에는 내가 평생을 혼자 살만한 위인은 못된다는 건 알았다. 혼자 코로나와 백신의 두려움을 극복했던 시기가 지나니 그래도 혼자 갑작스레 몹시 아플 때 함께 병원으로 갈 누군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이렇게 말은 해도 미래의 배우자에 대한 이유가 안전에 대한 필요성이라고만 할 순 없다. 누구나들 함께 살아갈 (말 통하는) 생명체가 옆에 있으면 위로도 되고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나는 홀로 충분했고 조급하거나 부족하거나 하는 감정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어느 레파토리에는 반전이 있기 마련이다. 





#2. "잘 지내?" 한 마디의 파장


어느 날 나의 고요한 호수에 파장을 일으키는 사소한 일이 벌어졌다. 질질 끌다가 연락을 끊은 지 1년이 지난 어느날 '전남친'에게서 갑자기 메시지가 온거다. 나이와 나라를 불문하고 전남친들이라면 늘상 하는 그 단순한 한마디.


 "잘 지내?"


보통 전여친들은 여차했으면 "꺼져 이새끼야" 할 만한데 우리의 관계와 헤어짐은 그렇게 지저분하지도 극적이지도 않았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외려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와의 기억들이 온통 겨울과 따듯한 유럽의 온기, 지금의 날씨와 내가 보는 자연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나는 마침 그런 추억들을 그리워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오랜만에 연락온 그와 자칫 '운명'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상황이 모두 만들어졌다. 퇴사 후 한국에 있다가 유럽에 여행을 우선 하려 돌아온 나와 매우 유사하게, 그도 내가 퇴사할 즈음 한국에서 일을 그만두고 미국을 여행한 후 바로 한 달 전 즈음 유럽으로 돌아왔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 구직 중이란다. 같은 유럽 땅에 있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하아. 왜 이렇게 레파토리가 비슷한지 '어머, 우리 정말 여전히 비슷하다 운명인가봐 그렇지 않니'하는 감정이 솟구쳐오르는 나를 보며 좌절했다. 이미 진거다. 여전히 애틋한 마음이 있는 내가 못내 미우면서도 그저 없는 감정처럼 구겨서 쓰레기통에 쥐어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린 오랜 친구처럼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긴 통화를 했고 지난 1년의 삶이 어땠는지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서로의 1년이 단 이틀만에 축약해서 공유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어떠한 이성을 향한 감정적인 교차점은 없었다. 그저 서로의 이야기를 이렇게나 재밌게 들어주고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고요했던 내 마음에 엄청난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망할 파동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 복잡하고 이해되지 않는 감정에 대해 이해하려는 것에 온통 집중한 내 뇌때문에 내가 진정 그리워했던 아름다운 유럽 풍경은 전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억울했다. 드레스덴에서 프라하로 단숨에 이동해왔고, 로맨틱한 도시로 잘 무장된 프라하임에도 불구하고 내 표정은 여행 내내 심각했다. 숨이 턱 막히도록 예쁜 풍경은 2-3초 내에 카메라에 담기는 것이 전부였다. 걷는 곳곳이 예쁜 고성이고 오래된 유럽의 파스텔 빌딩들인데 며칠 간 그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프라하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



내 뇌의 온 영역들은 내게 갑작스레 치고 들어온 이 알 수 없는 감정의 요동때문에 난리가 났다. 이 자체로도 충분히 내 자신이 심려스러웠다. 유명한 '먹기사' 영화 속 줄리아 로버츠가 엉엉 울면서 했던 대사가 분명하게 떠오르진 않아도 정확하게 내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별 후 그녀가 겨우 찾았던 단단한 기쁨이 다시 새로운 애정전선을 끌고들어 온 한 남자때문에 순식간에 깨질 것 같은 얇은 유리장처럼 유약해졌다. 그녀는 자신에게 고백하는 그 남자를 바라보며 울면서 뛰쳐나간다. 새로운 사랑에 대한 두려움 혹은 자신이 겨우 찾은 '밸런스'를 깨어버리는 것에 대한 겁이 몰려왔으리라. 뭐 물론 내 경우는 이미 지나간 사람이었고 그 사람은 단순히 안부를 궁금해했던 것 뿐이었지만 그렇게 작은 손짓조차 내 감정은 순식간에 취약해졌다. 간만에 찾은 안정된 감정을 완벽하게 뒤흔들어버린 거다.


그의 단순한 안부가 왜 나를 이렇게나 흔들었는지 내 심리가 궁금했다. 이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정의를 내릴 수 없어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널 여전히 사랑해'의 신파극같은 분명한 마음이었다면 슬퍼나 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를 이성적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왜 상대는 그렇게나 태평한 세상에서 잘 살고 있을 텐데 나는 그 딴 연락 하나에 온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고 있어야 하나 억울했다. 알 수 없는 속상함이 마음을 뒤감쌌다. 다시 연락하지 않는 우리가 미웠고 나는 어느새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그 기분에 휩싸였다. 검은 색 연기같은 오오라가 나를 따르는 기분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가 못나보였고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은 비대칭 얼굴이라던가 앙 다문 입때문에 더 네모나보이는 얼굴형에 눈이 갔다. 끊임 없이 툭 툭 튀어오르는 턱드름이 지긋지긋해보였다. 


도대체 이 감정이 어떻게 해야 다시 회복될 수 있는지 답을 알지 못해 답답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보고, 대화를 해보거나 처음 보는 무리들이랑 놀기도 해봤지만 좀처럼 벗어나질 못했다. 그러나 때론 답은 의외의 순간에 콩고물 떨어지듯이 주어진다.




#3. 파장을 잠재우는 열쇠


복잡한 심경이 서서히 가라앉을 즈음 먹었던 mamacoffee라는 카페의 브런치 (6, Vodičkova 674, Nové Metro, Praha)



전날 미친듯이 운동을 한 후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늦은 아침 브런치를 먹으러 카페에 갔고 그 곳의 활기찬 분위기는 회복의 복선을 의미하는 듯 했다. 내 심정을 알리 없는 이전 체코 동료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 뜻밖의 해결책이 될 줄 생각도 못했다. 이 친구로 말할 것같으면 상하이에서 만난 중국 미녀같은 여자애랑 결혼한 앤데 심성이 착하나 강렬한 영어 액센트때문에 센 줄 아는 오해를 받았던 친구다. 내가 인별그램에 올린 체코 로컬 음식 사진을 보고 메시지가 온거다. 전혀 연락없던 애가 뜬금없이 자기 고향인 프라하에 있으니 놀랐나보다. 한참을 프라하와 이전 회사 얘기를 하다가 왠지 모를 진심이 담긴 찡한 말을 들었다. 


"야, 그냥 돌아와. 우리 진짜 너가 다시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글썽이는 표정 이모티콘) 고마워. 나도 여기서 일 못구하면 갈 것도 생각은 하고 있지.

"너 가고 나서 대신 같이 일하게 된 에이전시는 아무래도 좀 다르더라. 우리 모두 너 엄청 보고싶어해. 안그래도 오늘도 PM이랑 너 얘기했는데. 우리는 너 올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하하!" 


갑자기 온통 사방에서 나를 위로하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여전히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따뜻한 그 한마디가 살짝 긁힌 내 마음을 휘감고 아물때까지 함께 해주는 그런 느낌. 우리의 대화는 한참이어졌고 내가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까지의 모든 길들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말들이 가득 찼다. 


어둑어둑하던 마을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축축할 것만 같았던 중세시대 느낌의 바닥이 의외로 바삭바삭하게 햇볕에 잘 말라 있었다. 우울함을 상징하는 줄 알았던 커다란 낙엽들은 가을의 분위기를 물씬 내며 더욱 그 계절을 즐기기에 충분한 장식품이 되었다. 강가의 요동을 일으키던 파장들이 사라지고 다시 고요해졌다. 


그제서야 나는 누군가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이 내 마음에 큰 역할을 한다는 걸 알았다. 갑자기 훅 들어왔다가 살아진 누군가의 존재 그 자체나 남녀 사랑따위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확증이 필요했던 거였다. 그리 단순할 수가 없다. 이제서야 숨겨진 몬스터의 정체를 발견했고 그 놈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할 때 어떻게 다독일지 답을 찾은 거다. 







때론 당신의 세계가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 외려 당신을 알아가는 가장 중요한 열쇠를 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 열쇠의 모양과 다루는 법을 알면 우리는 더 훌륭한 조련사가 되어 감정이라는 복잡한 것들을 정리하기 쉽게 되는 게 아닐까. 실체를 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이제야 좀 더 여유롭게 내 마음에 던져지는 돌멩이들을 여유롭게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다. 


프라하가 참 아름답다. 벽에 아무렇게나 걸린 작품들조차 예뻐보일 정도로. 감정이라는 것이 믿을만한 건 못되서 또 어떻게 요동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루는 법을 알았으니 이겨내볼만 하다. 오늘은 기분 좋은 재즈풍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어야 겠다. 더 로맨틱하고 생생한 그런 음악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선이 거의 안보이는데 너 양성 맞아? (응, 맞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