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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눗 Jan 07. 2020

어벙한 최종 연봉 협상

싱가포르 디자이너 오퍼 - 돈을 높여도 기쁘지가 않은 건 왜지

공격적인 통화 이후, 그들이 약속한 시점인 수요일에 메일이 도착했다. 


'In-Principle Terms of Offer'이라는 제목의 메일을 열자마자 연봉 금액이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고, 보너스, 에쿼티를 포함한 주요 복리후생 관련 내용들이 줄줄이 설명되어 있었다. 첨부파일도 무려 5개나 된다. 내 생에 태어나 규칙적으로 주어지는 보너스를 주는 회사는 처음이라 막상 오퍼를 받으면 잔뜩 쫄면서 냅다 감사합니다하고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C사에서 준다는 연봉과 의외로 차이가 나니 괜히 인간이 치사해진다. 골치가 아프다. 다른 한 쪽에게 '노, 땡큐'로 거절을 해야하는 상황도 괴롭고, 비용 차이가 나는 걸 감수하고도 내 적성과 잘 맞는 회사를 선택해야만 하는 지도 고통스럽다. 남이 들으면 행복한 고민한다며 귀통배기를 날리겠지만 회사와 상대할 땐 늘 넙죽 엎드려 '네'라고만 해왔던 나같은 쪼무래기에게는 '거절'과 '협상'이라는 단어 부터가 스트레스인거다.


게다가 오퍼에 적혀있는 수많은 숫자들의 향연, 그것도 투자, 연금, 세금 따위의 돈과 관련된 모든 숫자라면 손사래 치며 싫어하는 나였기에 제대로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게 정말 내가 돈으로 받는 금액인지, 잠정적인 돈의 가능성이 있는 어떤 무형의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A사의 내 담당 리쿠르터는 차근히 하나씩 이게 뭐고 저게 뭔지 설명해줬지만, 한 쪽 귀로 이해한 후 한 쪽 귀로 흘러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했다.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기본 월급이 B사랑 차이가 나고 싱가포르 이전 비용도 지원해주는 것에서도 차이가 나니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매우 길게 메일을 썼다. 말로 설득이 안되니 글로 써야했다. 구글 검색에서 떠오르는 아티클들을 읽어보니, 협상 전문가들은 심지어 다양한 협상 멘트들까지 쥐어주며 '전화 협상'이 더욱 좋다고 하는 조언이 70%였으나 나는 나머지 30% 이메일 협상의 기적을 믿어야만 했다.


안녕, 프러덕트 디자이너로써 오퍼를 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이 포지션가 너무 기대되고 내가 팀에 잘 맞는 사람일거란 걸 알고 있어. (오글) 특히 나는 내 심사관이었던 2명의 디자인 리드들과 수석 디자이너의 통찰력과 지식에 대해 매우 감명 받았거든. 그리고 내가 쌓아온 경험들이 E팀 멤버로써 A회사의 신뢰도와 믿음을 더욱 최대화할 수 있게 만들거라 믿고 있어. 

그런데, 오퍼를 수락하기 전에 보상 금액과 관련되서 좀 논의하고 싶어. 너네 회사가 내 No.1 선택지이지만서도, 다른 회사에서 말한 금액과 XX 만큼 차이나고, 그들은 프로베이션(수습 기간)도 없고 심지어 싱가포르 이전 혜택으로 XX을 추가로 주거든. 내가 전화로 이야기 했듯이, 모든 부분에서 다 채워지긴 어렵겠지만 좋은 방안을 함께 찾아 보았음 해. 

내가 너희 회사랑 오랫동안 함께 하려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다른 회사가 말한 것들이랑 비슷하게 맞춰준다면 기쁘게 너희의 오퍼를 받아들이고 싶어. 난 내가 해당 팀에 가치있는 기여를 할 거란 것에 자신 있고, 우리가 상호간 동의하는 지점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그럼 답변 기다릴게. 고마워, 안녕! 


불꽃 구글검색의 힘을 입어 솔직한 협상 메일을 쓴건데, 바로 다음 날 오전에 통화하자고 메일이 왔고 우리는 그날 오후에 긴 통화를 나눴다. 담당 리쿠르터와 다른 한 분. 지난 통화에서 나를 다그쳤던 매니저급의 그녀, T였다. 그녀는 여전히 확신있는 말투를 가지고 있었지만 통화의 공기부터 다르다고 생각할 정도로 '네 말을 잘 듣고 있단다' 식의 사근사근한 추임새를 중간 중간 발사했다. 왜, 왜 이러지.


난 만반의 준비를 했던 스크립트를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고 왜 내가 더욱 높은 연봉을 받아야 하는지를 어필해댔다. 스크립트가 끝이 나고 전쟁을 예상했는데, 그녀는 매우 의외로 '그랬구나, 그래.'라고 부드럽게 답을 하는 게 아닌가. 지난 통화와는 확연하게 다른 그녀의 반응에 무슨 일인지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우선 진위를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러면 혹시 너가 받은 그 오퍼의 상세 내역을 캡처해서 보내줄 수 있겠니?" 매우 부드럽고 상냥했지만 날카로운 질문이다. 니말이 뻥인지 아닌지를 밝히라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주저없이 메일을 열어 회사의 민감한 부분은 싹 제외한 채 포지션, 기본금, 이전 혜택 비용(1회 비행기 값, 2주 간의 호텔 비용 등)만 캡처해서 회사명을 지워 바로 메일로 송부했다. 왠지 통쾌했다. 진작에 그러고 싶었던 일이지만 나서서 하기가 민망했던 터였는데, 진위를 확인해줘서 고맙구나.


T는 확인 후 고맙다고 하더니 자신들의 오퍼에 쓰여진 내용을 재해석해주기 시작했다. 매우 빠르고 전문적으로 숫자를 다시 나열해대기 시작했다. '사실 보너스와 에쿼티(주식같은 것)를 포함하면 네가 현찰로 받게 되는 금액은 거의 C회사의 오퍼 금액보다 더 많은 거야, 기본 월급 얼마, 보너스 1년에 최소 얼마, 에쿼티 얼마, 그리고 우리 추가로 주어지는 베네핏 얼마, 다 합치면 @#$@%#% 얼마가 된단다. 에쿼티에 대한 개념은 잘 알고 있니? 이런 것들이 그냥 무형의 것이 아니라 다 현찰이야 현찰, 네 손에 현찰이 @#@%@#% 이 주어지는 거라구.' 


속사포로 숫자를 읋어대니 받아쓰고 있는 것이 숫자인지 글자인지 분간도 안되고,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어머, 그렇구나!'라고 만족하게 되는 이상한 마음이 드는 거다. 정신을 다시 차려서, '아니 그렇긴 하지만 기본금이 다르니까... 그리고 싱가포르 이직 혜택은...'라며 어버어버 거리니 T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 너의 담당 리쿠르터가 굉장히 열심히 너의 싱가폴 이전 혜택을 준비해두었어. 그래서 #@%#의 비용을 우리가 도와줄수 있을 거 같은데 너가 집 보증금을 내든, 비행기 값을 내든, 월세를 내든 자유롭게 사용하면 돼.'라고 답했다. 비용은 C사보다는 적지만 여전히 그녀는 당당했고 매우 전문적으로 설명을 해나갔다. 경륜에서 묻어나는 카리스마와 멋짐이 묻어난다. 이게 HR의 파워인가.


"그러면 오퍼를 승인하는 거지? 우리도 우리 직원들이 기쁘게 일을 시작하도록 돕는 게 제일 중요하거든. 이렇게 해결되서 좋다." 그녀의 말에 나는 마법에 홀린 듯이 알았다고, 고맙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고,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정된 사항을 포함한 새로운 (임시) 오퍼 메일을 보내왔다.


전화를 끊고 홀연히 마법에서 풀리자 다시 내용을 찬찬히 살폈다. 에쿼티가 아무래도 너무 마음에 걸렸다. C사도 있는 건데. 그리고 보너스는 회사의 상황이나 내 성과에 따라 달라진다니 보장이 안되는 금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 정기적인 보너스 따위 받아본 적 없는 자에게 제일 중요한 건 기본금이다. 나는 급히 메일을 다시 보냈다. 미안한데 내가 에쿼티에 대해 다시 할 말이 좀 있다며. 그러자 담당 리쿠르터가 다시 전화(구글 행아웃)를 바로 걸었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똥멍청이 같은 말로 어버버 거리며 그래도 기본금이 그대로라 마음에 걸린다며 설명하니 그녀는 다시 전체 비용을 T처럼 읊어주었다. 보너스가 늘 보장된 보수는 아니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다 꾸준히 주기적으로 보너스를 잘 받던 남자친구와 우리 아빠가 떠올라서 (괜히 말했다가 받아본 적 없는 티 낼까봐)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에쿼티는 어쨌던 캐쉬가 아니라는 둥 지금 생각해도 쥐구멍에 숨고싶은, 말도 안되는 말을 말이라고 쏟아놓았다. 그녀에게 정말 미안할 지경이었지만, 워낙 기본금 차이가 적지 않아서 그냥 수락하기에도 속상하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는 한숨 비슷한 걸 쉬는 듯한 한 마디를 결국 내어놓았다. 그러면 우리가 최대한 해줄 수 있는 건 Sign-on bonus라고. 이는 신입직원 상여금으로 입사 시 1회만 부여되는 보너스다. 그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단다. 다른 동료에게 내 공식오퍼 발행하는 걸 진행할까 말까 물어보는 그녀에게 나는 또 말을 번복하게 될까봐 우선 가족과 상의하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는 끊었는데 너무나 괴로웠다. 돈과 관련된 일이라면 금방 포기하고 너 가지라고 줘버리는 게 맘편한 나인데 왜 이렇게 민망한 협상에 나는 돌입한 걸까. 무엇보다 담당 리쿠르터의 한숨같은 마지막 말이 제일 마음 속상했다. 돈을 더 받아낸 건 맞는데, 왠지 잘못한 것만 같고 돈만 밝히는 지원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기쁘지가 않았다.


물론 내 런던 동료가 줬던 조언 중에서 HR의 역할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직원을 데려오는 심리전을 치루는 사람들이랬다. (그녀도 런던에서 나처럼 2개 회사에서 오퍼를 받으면서 큰 고민과 고뇌의 시간을 겪었고, 결국 외국에서 이름만 들으면 아는 큰 음악 앱 회사에 들어갔다.그리고 첫 월급에 바로 오케이하면 절대 안된다며. 해당 파트 전체에 할당된 버짓이 있으니 그들이 충분히 다양하게 조정할 수 있다며. 그녀도 다른 회사의 오퍼를 받아서 거길 가겠다고 순수하게 거절을 했더니 거의 50%가 훌쩍 뛴 금액을 제안하며 자기 회사로 오라고 했다고. 무서운 세상이다.  


하여간 그렇게 어눌하고 민망한 협상이 끝났다. 담당 리쿠르터는 다시 수정된 최종 안을 보내주면서 이게 마지막 오퍼임을 강조했다. 밤 늦게까지 어벙한 내 설명을 듣느라 너무 고생한 그녀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문득 T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우리 직원들이 만족하며 일 할 수 있고, 기쁜 맘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고 있어. 그게 우리의 일이거든." HR이나 리쿠르터의 역할이 물론 회사의 이익을 위해 적정한 비용으로 필요한 사람을 고용하는 것을 돕는 것도 있지만 직원들이 회사에 만족하면서 다닐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그러니까 지난 번의 강렬하고 공격적이었던 통화는 회사를 위해 한 일이었고, 그 이후 협상 과정에선 나를 위해 조정해주는 일을 해준 거다. 


나같은 쪼랩에게는 협상이란 두 단어가 정말 편치 않다. 아마 C사로부터 받은 오퍼를 다른 한 손에 쥐고 있지 않았다면 협상은 내 인생에 없는 단어였을 것이 분명하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가는 잘난 것 하나 없는 나이기에 끝나고서도 혼자 반성하는 후폭풍의 시간을 겪긴 했지만 - 해외 취업의 또 다른 문턱을 밟아본 것이니 큰 경험의 자산이 되었다(고 믿는다). 


결론은, 어눌하고 어설퍼도 협상은 협상이다 - 자신을 갖고 미리 할 말들을 잘 준비해서 조심스레 대처하면 되더라. 그리고 못해도 괜찮다. 결국 목적인 해외 취업의 난관을 끝이 난 것이니까. 이제 앞으로 걸어갈 것들에 충실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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