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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Aug 02. 2024

무지개 빛깔 용기

너의 용기는 무지개 파워!

서너 해 전 일이다.

어린이집 마당에 커다란 에어바운스가 놓였다.

그 풍덩한 꼴을 유지하기 위해 공기 주입이 지속적으로 필요한지, 전동 에어펌프 구동 소리가 마당 안을 왕왕 채웠다.

방방이(트램펄린)를 타고, 허들 몇 개를 넘은 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단순한 코스지만 뛰어들기 전부터 흥분을 감추지 못한 아이들의 눈빛이 형형했다.

선생님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애들은 에어바운스에 들입다 뛰어들어 제 몸을 함부로 부딪치며 놀았다.

몸을 거칠게 내던질수록 크게 튀어 오르는 팽팽한 탄성에 잔뜩 신이 나 높이 더 높이 솟아올랐다.


유독 한 녀석만 끼지 못 하고 선생님의 손을 꼭 잡은 채 에어바운스 곁을 빙빙 돌았다.

선생님이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에어바운스 위에 대고 촉감을 느껴보도록 유도했다.

아이는 선생님의 귀엣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에어바운스에 조금 다가갔다. 그러나 몸을 엎드려 거칠게 미끄러져 내려오는 한 아이의 괴성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 아이는 에어바운스의 ‘위용’에 압도된 듯 보였다.

제 가녀린 몸에 비하면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크기 하며, 강렬한 색감, 마당을 울리는 강렬한 소음에 잔뜩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우리 집 애다.


남의 집 애들은 잘만 들고뛰는데, 무어가 그리 두려운 걸까?

‘아이야, 이건 푹신푹신한 거야. 넘어져도 몸이 상하지 않는단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스스로 다독여 보지만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엄마가 되니 ‘보통’에 자꾸 집착하게 되었다. 성장 속도, 발달 과정, 놀이 방식이 보통의 아이들과 다르면 여간 마음 쓰이는 게 아니었다.

에어바운스를 눈앞에 두고 그 주위만 뱅뱅 도는 건 보통 아이들의 모습이 아니다.

왜 너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다시 그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아이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다시 같은 시간의 문 앞에 서게 되었다.


아이는 태 속에서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꺼내진 이후 보름간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었다. 아이의 병은 위중했다. 태변 흡입으로 폐에 염증이 생겨 자가 호흡이 어려웠다.    

차마 짐작하기 어렵지만 아이에게는 그날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모체와의 단절이 변고와 다름없었으리라.

나오자마자 가슴에 안고 환영한다고, 사랑한다고, 나오느라 애썼다고 말해주지 못해서 이렇게 세상을 못 믿는 걸까?

그래, 아이가 두려움에 압도되어 살아내는 시간은 나로 인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조금 더 편안하게 품고 있을 걸.

나는 다시 그 시간 위에 서서 후회와 자책으로 뒤섞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이가 낯선 상황에서 지나친 경계심을 보일 때마다 회전문처럼 나는 다시, 또다시 그 시간의 문 앞에 서서 주저앉았다.


그러나 아이는 내 지나친 염려를 비웃듯 제 속도대로 야물었다.

지금은 친한 친구와 함께라면 에어바운스에 들어가서 잘 논다. 또, 어느 정도 탐색을 마치고 제 기준에서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판단하면 유아용 풀에도 들어간다. 무엇보다 낯선 이가 “안녕? “인사하면, 비록 땅을 볼지언정 개미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라고 답한다. 비로소 아이 마음에 세상과 소통하는 작은 창이 난 것 같다.

나아가

아이가 ‘보통’의 사람보다 남다른 용기를 내는 일도 있다.

나는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곤충을 손으로 잡을 수 없다. 나는 속을 알 수 없는 바닷가 돌틈 사이에 손을 넣을 수 없다. 나는 게를 맨손으로 잡을 수 없다. 전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집 곤충 사냥꾼에겐 일도 아니다.

아이는 그야말로 무자비한, 생물 사냥꾼이다.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메뚜기, 팥중이, 콩벌레, 꽃무지, 풍뎅이, 청풍이 등 곤충을 잡을 때 별도의 채집 도구가 필요하지 않다. 손으로 낚아채는 게 예삿일이다. 재빠르게 손을 오므려 채는데 희한하게도 곤충의 성체가 상하지 않는다. 어디를 어떻게 잡아야 다치지 않는지 직감으로 안다. 물고기나 돌틈 사이에 서식하는 게를 잡을 때도 똑같은 방법으로 잡는데 이번엔 백발백중 놓쳤다 싶은데 주먹 쥔 손을 펴보면 있다!


“어떻게 잡는 거야?”


“도망가기 전에 잡으면 돼.” (•••응?)


“독이 있으면 어떻게 해?”


“응, 털이 많거나 다리가 너무 많거나 화려하면 독이 있을 수 있어. 그건 손으로 잡으면 안 돼.”


“아, 무작정 잡는 게 아니구나.”

아이의 사냥법을 가만히 지켜보니 곤충이 곧 튀어 오르거나 날아오를 방향의 전환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아직 언변이 미숙하여 사냥의 원리는 설명하지 못하지만 몸소 체험하여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이의 성장으로 깨닫는 중이다. 세상에 겁쟁이는 없다. 우리 모두는 그저 다른 색깔의 용기를 품고 있다. 용기를 내는 때와 자리가 다를 뿐이다.

나는 익숙한 거리를 운전하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고, 남편은 외국 식당에서 콜라 한 잔을 시킬 때도 용기를 내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치과 가는 데 용기가 필요하지만 아이는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 용기가 필요하다.


저이는 나보다 용기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이번엔 용기 내는 자리가 아니었을 수 있고, 때가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돌이켜보니 그때 아이는 에어바운스 앞에서 서성였지만 지렁이가 행인들에게 밟힐까봐 풀숲에 들어 놓아줄 때엔 별 용기가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색깔의 용기를 품고 있기에, 용기가 필요한 이에게 내가 가진 용기를 꺼내어 줄 수 있다.

나의 용기로 힘을 주고, 때때로 나도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누군가가 용기를 꺼내어주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가진 다른 색깔의 용기로 작은 일, 큰 일을 감당하며 살아가기에 우린 다시 평온한 일상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우리 모두는 무지개 빛깔 용기를 가지고 있다.

뭐든 ‘처음’ 마주하는 일에 두려움이 많은 아이를 둔 덕분에 사람 공부를 한다.

아이를 키워야 어른이 된다는 말은 부모의 인내와 희생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도 포함하는 것 같다.

아이를 키워보니 인간을 보는 다양한 관점이 생기고, 거기서 이해와 관용의 싹이 트는 걸 본다.


*얘야, 여직 세상에 두려운 게 많아도 괜찮다. 넌 자연물 앞에서만큼은 용맹한 전사니까. 너의 용기는 무지개 빛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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