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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Aug 05. 2024

시적인 공간 1.

사소한 제주 여행기

아이의 여름 방학 일정에 맞춰 일주일간 제주에 머무르기로 했다.

주어와 술어를 갖추어 말을 잇기 시작한 이후로는 처음이라 아이는 떠나기 몇 주 전부터 날짜를 세었다.    

“오늘 자고, 내일 가는 거야?”

“아니, 열 밤도 넘게 자야 해.”

“엄마는 왜 맨날맨날 열 밤이라고 해? 너무 많아.”

이 대화를 몇 번씩이나 주고받고 나서야 아이는 잠이 들었다.


제주로 떠나는 날, 아이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걷지 않고 뛰어다녔다.

우리 부부도 내심 이날을 기다렸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생활의 공간에서 탈출하는 날이 오도록 날짜를 세었다.

과하게 들뜬 아이를 가라앉히느라 태연한 척했지만 오랜만에 떠나는 제주라 마음이 일렁였다.

서로 기분이나 태도를 맞추려 마음을 다하지 않아도 좋은 친구네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 더욱 기대가 되었다.

그 집도 엄마, 아빠, 아이로 구성된 가족인데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친구로서 잘 지내는 집이다.

육아 품앗이의 기쁨을 안 이후부터 종종 함께 여행을 떠난다.

공항에 닿자마자 여행은 시작되었다.

사무실과 집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마음이 새삼 새로웠다.

어제와 오늘이라는 ‘같은’ 시간의 선명한 경계가 생경했다.


출발은 지연되어 늦은 저녁 제주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저녁을 먹고, 한경면 용수리에 다다르니 밤이 되었다.

몇 달 전 마당이 딸려있는 2층 집을 빌려놓았다.

집 안팎이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여행자’들의 안도감이 전해지니 이번 여행의 설계자인 나도 흡족했다.

부엌에 난 작은 창만 열어도 물기를 가득 띠고 불어오는 바람에 제주의 실재를 느꼈다.

마음이 좋았다. 여행 목적지에 무사히 닿아서 안심이었고, 안락한 집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있어서 기뻤다.




아침 8시에 일어나니 아이들은 벌써 거실 소파에 기대앉아 만화를 보고 있었다.

지난 밤 늦은 시간이라 장을 보지 못해 아침거리를 사 오기로 했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먹을까, 커피 먼저 마실까 고민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여행지에선 선택할 여지가 많아도 전혀 괴롭지 않다.

이 시간에 문을 여는 가까운 식당에 가기로 했다.

차귀도 근처 생선을 파는 식당인데 전복죽도 팔고 성게미역국도 판다.

쏭(친구 엄마)과 함께 차를 타고 식당으로 간다. 차귀도로 가는 길이 아름다웠다.

차 창을 열고 제주의 습기 가득한 바람을 얼굴로 맞았다.

이내 마음이 모자람 없이 가득 찼다.  

식당 주인에게 요 근방 문을 연 카페는 없냐고 물으니 기다 아니다 대답 없이 대뜸 전화를 건다.  

커피를 찾는 손님 왔으니 30분 일찍 문 열란다. 맞은편 가게인 모양이었다.

2층이 살림집인지 카페 주인이 대번에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다.

차귀도로 가는 유람선을 타기 전 커피를 사기 위해 사방팔방 동네를 헤매고 다닌 사람들이 반가운 표정으로 카페에 몰려들었다.

가게 이름이 재밌다. 다금바리스타다. 다금바리v스타인가? 다금v바리스타인가?

무엇이든 좋다. 카페 주인이 다금바리를 좋아하든, 그것을 잘 낚는 낚시꾼이든, 다금(딴딴하다)한 바리스타이든 커피 맛이 퍽 좋으니 그만이다.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아 아침밥을 나누어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오늘 어디 갈까?

숙소에서 가까운 금능해변으로 가기로 한다.

누구 하나 서두르지 않고 오늘의 ‘일’을 도모하니 편안하다.

나는 다음의 계획을 예측하고 대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빠듯한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타고난 성정이 ‘아니면 말고 ‘가 어려운 고지식한 사람이라 더 그렇다.

내가 지닌 성질을 내려놓고 여행의 힘에 기대면 마음의 자세가 제법 유연해진다.

위아래층을 우당탕탕 오르내리며 뿜어내는 아이들의 생명력으로 집안의 공기가 생기로 가득 찼다.


금능해변은 어린애들이 자박자박 물속에서 걷기 좋을 만한 얕은 수심이 특징이다.

우리 집 아이의 무릎에 닿을 만한 높이이니, 물놀이를 하기 위해 커다란 튜브를 매고 온 학령기의 큰 아이는  대번 실망한 눈빛을 보인다.

그러나 물이 빠진 자리마다 생업으로 분주한 소라게, 돌게, 조개 같은 것들이 지천이라 새들했던 그 아이의 얼굴도 곧 생기로 피어난다.

해가 서향으로 기울고 간조 시간이 되자 물은 속절없이 밀려나갔다.

미처 해류에 편승하지 못한 살아있는 것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래바닥에 그득했다.

생물인인 우리 집 애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속세를 떠난 스님처럼 자연에 귀의하였다.

세상으로부터 양쪽 귀를 닫고 바다생물에 몰두하느라 몹시 분주하지만 또 평화롭다.

남편은 아이의 안위를 살피며 따라다니느라 뙤약볕에 맨살이 익는지도 모른다.

  

숙소에 돌아와 모두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식탁에 둘러앉으니 웃음이 터졌다.

내일은 태양에 감히 맞서지 않고, 겸손된 마음으로 방어하리라 서로 다짐하고는 술잔을 높이 모았다.

바다에 온 정신을 기울이느라 원기가 바닥난 애들은 이미 깊은 잠이 들었다. 부모의 마음은 더없이 기쁘다.

남편이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와 오늘 달이 유난히 예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모두들 마당으로 나가 달을 올려다 보았다.

남편의 말은 주정이나 허풍이 아니었다.

하늘로 비산하는 모양의 구름 덕인지 달빛이 유별스레 아름다웠다.

취중에 저마다 핸드폰을 들고 달을 찍느라 법석거렸다.

자기가 찍은 달의 자태가 제일이라며 서로에게 네모난 창을 보여주느라 야단이었다.

술에 취하고 여행의 감흥에 취하였지만 오늘 달을 발견한 기쁨은 다들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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