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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do Aug 06. 2024

시적인 공간 2.

사소한 제주 여행기

헐값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제주행 비행기표가 염가인 대신 밤 9시가 돼서야 숙소에 도착한 탓에 하루를 흘려보냈다.

여행지에서 하루의 가치는 단돈 몇 만 원으로 따질 것이 아닌데 또 판단이 틀렸다.

왜 나란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합리적인 의사 결정의 기로에서 시간의 가치가 돈 앞에서 매번 무너진다. 후회가 뒤따르는데도 계속 같은 결정을 하는 게 이상하다.


제주에서 세 번째 아침을 맞았다.

멋진 카페도 한번 못 가보았는데 일정의 반이나 지났다니 조바심이 났다.


나는 에너지의 방향이 안으로 향한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기쁘지만 으레 혼자 있는 시간을 바라고, 적당한 때를 엿본다.

그 시간이 길지 않아도 좋다. 단 30분이라도 내 안으로 침잠할 수 있다면 활력이 새어 나오는 틈이 메워진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아침에 일어나니 쏭(친구 엄마)이 이미 두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놓았다.

(마음씨도 고운 사람, 복 받으세요.)

아빠들은 지난밤 숙취로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


Now or Never!



“나 잠깐 동네 산책 좀 다녀와도 될까?”

(거절은 거절합니다.) 이미 모자를 푹 눌러쓰고 신발을 신은 채 물었다.


“그럼요. 다녀오세요.”


그녀에게는 나의 행선지나 혼자 걷는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나의 성향을 알기 때문에 시간과 마음을 기꺼이 내어준다.

그래서 고맙고 나도 그녀에게 좀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침 8시를 갓 넘긴 시간인데 벌써부터 아래로 내리쬐는 해의 기운이 사나웠다.

바닥에 그림자를 넉넉히 드리우는 나무 밑을 걸어야 전방 시야가 확보되었다.

발걸음 닿는 데마다 땅의 경계를 돌담으로 가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제주 고유의 돌담은 특별하다.

 

돌들이 서로를 치받고 내리받은 모양이 아무리 봐도 위태로운데 거센 바람에도 부침 없는 돌담의 자태에 감응이 인다.

바람의 길을 내어주는 틈 덕인가. 돌 쌓는 특별한 기술 덕인가.

탐라가 담+나라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본 적이 있다.

제주를 상징하는 돌담의 위치를 따져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동네에서 벗어나자마자 눈에 띄는 건축물이 보인다.

카페가 아니면 지나치게 근사한데?

카페가 맞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백발 성성한 초로의 주인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주인의 언행이나 태도가 점잖고 신중하여, 조금 어렵다. 자유롭고 가벼운 분위기는 아니다.

메뉴를 둘러보니 가격이 상당하다. 아메리카노 8천 원, 라떼 9천 원?

나갈까? 싶었지만

카페 분위기가 고상하여 돌아나가기가 참으로 멋쩍었다.

지금 ‘딸랑딸랑’ 종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들어온 손님이 나뿐인데 바로 돌아나가는 건 모양 빠지는 일이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이 땡볕에 같은 길을 돌아가는 건 못할 짓이다.

이왕 들어왔으니 마시자!


“따뜻한 라떼 주세요.”


커피를 시키고 창가에 자리를 잡으니 눈앞에 고래 모양의 섬이 한눈에 담긴다.

차귀도 전경-카페 창으로 보니 고래 모양!

사람을 써서 마당을 가꾸고, 이 멋들어진 건축물을 유지 보수하려면 커피값이 비쌀 수밖에 없겠구나.

주문한 지 10분이 됐는데도 픽업 벨이 울리지 않는다.

손님은 나뿐인데 왜지?

마음이 술렁거릴 찰나에 진동이 울린다.

커피를 올린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아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사진으로 남긴다. 정성을 다해 찍어도 내 눈만 못하다.

아이폰 15보다 내 눈이 보배구먼.

책이라도 들고 와 단 몇 줄이라도 읽을 걸. 생각이 스친다.

아니다. 그건 여행을 함께 온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개인주의적인 나란 인간.

주인장께서 매뉴얼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커피를 제조하신 듯하다. 받은 커피를 보고 느낌이 왔다.

주인의 커피 마스터로서의 자신감이 커피에 온전히 담겨있다.

카페라떼의 정석

‘나는 카페라떼의 정석이로소이다.‘


다른 건 차치하고, 맛있다. 커피를 마시러 일부러 찾아올 만큼 맛이 좋다.  

원두는 신선하고, 우유와 밸런스가 잘 맞는다. 우유거품이 인상적일 만큼 풍성하지만 겉돌지는 않는다. 그래서 맛이 조화롭다. 근래 마신 카페라떼 중에 제일이다.


이 아름다운 전경을 눈에 담고 커피를 마시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함께 온 사람들 얼굴이 생각나서 오래 앉아있기는 어려웠다.

내가 유유자적 시간을 즐기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준 고마운 벗을 위해 아인슈페너 한 잔을 테이크아웃했다.


여행지에서 혼자 시간을 갖는 건 내게 중요한 일이다.

30분의 고독으로 마음의 힘이 생기고, 몸에 볕이 들어찬다.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잠시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니 내향인에 대해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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