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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Aug 10. 2024

시적인 공간 5. <맺음>

사소한 제주 여행기

제주에서 멋진 노을을 보는 것이 희소한 일은 아닐지언데 나는 그것과 별 인연이 없다.

몇 해 전에도 제주 동부권에 머물면서 무려 1시간을 운전해 신창해안도로까지 일부러 찾아갔지만 우리 동네 하늘과 다를 바 없는 하늘을 보고 왔다.


대체 어디야? 여기 맞아?


해가 다 떨어질 때까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다가 숙소에 돌아왔다.

그전에도, 그보다 더 전에도 제주의 석양을 카메라에 담겠다며 호기롭게 찾아갔지만 꽝, 꽝, 꽝.


생각해 보니 나는 뽑기 운이 없다.

초등학교 때 뽑기를 했다 하면 꽝을 뽑았다.

매일 같이 문방구에 출근도장을 찍고, 쭈그려 앉아서 심혈을 기울였으나 꽝, 꽝, 꽝.

보다 못한 주인이 가자미 눈을 요리 요리 하고선 오다리(문어로 추정)를 대신 뽑아주었다.

나는 맥이 빠져 친구에게 주고는 뽑기를 다시 하지 않았다. 운이 없을지언정 반칙은 싫다는 성정 때문인데 고지식해서 그렇다.


꽝만 뽑는 사람은 기대가 없다.

기대가 없으면 마음이 편하다.

내 힘이 미치는 영역이 아니니 별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신창풍차해안도로를 다시 찾았다. 숙소에서 걸어갈만한 거리인데 들르지 않는 것도 좀 그래서 왔다.

오늘도 구름이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노을은 아마 못 볼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의 설계자로서 자꾸 겸연쩍은 얼굴을 하게 된다. 노을을 못 보는 것이 내 탓은 아닌데 또 내가 하늘이 내린 왕도 아닌데 나의 ‘부덕의 소치‘인양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게 되었다.


여기가 노을이 멋진 곳이라는데 나는 노을요괴인가? 크크. 날씨요정 반대 그런 거.


싱겁기는 꼭 고드름장아찌인 나의 말에 동반자들은 별 반응이 없다. 노을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은 얼굴을 하고서는 자꾸 뒤처진다. 저녁이나 먹으러 가잔다. 애나 어른이나 체력이 꽤나 부치는 모양이다.


돌아나가는 길에 연신 뒤를 돌아보지만 역시나 짠-하고 나타나는 행운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여기는 노을맛집이 아니라 게-맛집이다.

도처에 살아있는 게들이 널려있다. 다리를 건너고 돌틈으로, 길섶으로 들어간다. 바쁜 걸음마다 목적이 있을 것이다. 저들도 종종 대지 않으면 먹고사는 일이 녹록지 않겠지.


엄마, 게밭이다. 게밭.


아이의 손이 말보다 앞선다.

어느 틈에 손아귀에 사로쥔 게를 아빠 벙거지 모자에 넣어 끝을 여매어 들고 다닌다.

이것들은 사람 구경, 우리는 니들 구경. 얼마나 지천인지 사냥꾼은 이내 흥미를 잃고, 포획물을 풀숲에 놓아준다.




제주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

마지막 날, 무얼 먹을까?

여행자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

흑돼지, 생선구이, 전복, 회.

설전이 오간다.

여행자는 제주에서 먹어야 맛있거나 제주에서만 먹을 수 있는 걸 먹고 싶다. 촌스러워도 별 수 없다.

숙소 호스트가 주변 맛집으로 파스타 가게, 쌀국수 가게, 짜장면 가게, 떡볶이 가게를 알려줬지만 그런 데를 가면 ‘맛있게 먹었다는 소문‘을 낼 수 없어서 가기

싫다.


차귀도 근방 생선구이집을 가기로 한다.

가게 이름이 <놀빛바다>인데 식당 안에서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면 작명의 기원을 곧 알게 된다.


차귀도 너머로부터 노을이 잔물지고 있었다.

‘노을맛집’에서 못 본 노을을 ‘생선구이맛집’에서 보다니.

좀 뜻밖이라 나는 멍청하니 앉아서 하늘을 물들이는 저녁놀을 바라보았다.


여행의 기쁨은 뜻밖에 발견한 무지개 같은 것일까?

오늘 생선구이집에서 본 노을처럼.

음식맛이 없어도 노을값을 치른 셈 치겠다, 하고 넉넉한 마음을 품었는데 옥돔구이가 맛있다. 살이 달큼하고 쫄깃하여 씹는 맛이 있다.


허기를 채운 아이들이 식탁 의자에 반만 걸터앉아서는 찡얼거린다. 몸의 방향은 이미 출입문을 향해있다. 밖에 나가자고 안달복달 야단인 애들을 몰고 식당 인근을 걸었다.

곤충을 찾기 위해 땅바닥만 보는 아이

늦은 8시지만 여직 해는 남아있어 바닥에 떨어진 곤충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뽕나무잎하늘소, 유리알락하늘소가 죽은 채 땅바닥에 뒹구는데 우리가 보아왔던 것보다 크기가 두세 배는 되는 듯하다. 사슴벌레 사이즈도 남다르다. 제주가 말뿐이 아니라 온갖 날것들이 살기에도 좋은 환경인가 보다.


언덕을 오르다 보니 오른편에 차귀도를 배경으로 한 포토존이 있다.

아이들은 웃고 뛰고 엉뚱한 표정을 지으며 제 사진을 먼저 찍으라고 난리다.

수평선 아래로 노을이 천천히 한 겹씩 떨어진다.

여름이 건네는 덤이다.

일몰 시간이 넉넉하여 해가 완전히 떨어진 후에도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연히 여행의 엔딩을 이런 식으로 기획한 것은 아닌데 자연의 우연한 연출로 꽤 괜찮은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뽑기에 내 운을 거는 것보다 마음을 내려놓고 묵묵히 걷는 게 중요한 일일 수도 있겠다 싶다. 운을 기대하면 욕심이 생기고, 꽝을 뽑으면 섭섭하여 기운이 꺾일 테지만 다 내려놓고 그저 내 길을 걷다 보면 도중에 무지개도 찾고, 노을도 찾는 기쁨이 찾아오지 않을까?


내 길을 그냥 걷자. 거저 오는 행운을 기대하며 힘쓸 필요 없다. 묵묵히 걷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찾을지 모른다. 오늘처럼.



- 글을 맺으며 -

저의 사사로운 제주 여행기를 읽어주신, 앞으로 읽어주실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일상에 힘을 주는 일이네요. 브런치 알림이 울릴 때마다 힘이 나고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소소하지만 읽을 만한 글로 계속 찾아뵙겠습니다.

여름이 지나갑니다. 부디 무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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