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생을 쉘든처럼

by ondo

미드 <빅뱅이론>에서 쉘든은 눈을 떠서 잠에 드는 시간까지 본인만의 세부적인 스케줄에 따라 움직인다.

매일 화장실에 가는 시간이 있고, 요일마다 입는 옷(배트맨 티, 플래시맨 티, 스타워즈 티 등 요일마다 입는 티셔츠가 엄격히 규정됨), 먹는 요리가 정해져 있다.


계절별 거실의 적정 온도와 습도, 빨래하는 밤,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요일을 룸메이트인 레너드, 친구들과 공유한다.

그는 본인의 환경을 규칙적으로 통제하는 데 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이다.


시트콤 드라마라서 캐릭터가 과하게 표현되었겠지만 쉘든이 끝내 노벨상을 수상한 이유(스포일러 알람!)가 극단적으로 단순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자신의 일상을 매뉴얼화한 책을 갖고 있다. (진짜 전화번호부 같은 ‘규정집‘을 갖고 있다! )

겉으로 보면 복잡하게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지만 들여다보면 통제 가능한 내 일상을 미리 규정해 놓았기에 그에겐 매 순간 선택할, 고민할 여지가 없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무얼 입을까, 무얼 먹을까, 먹지 말까, 무얼 신을까, 어떤 길로 갈까 고민한다. 고민과 결정의 연속이다.


얼마 전 직장 동료에게 들었다. 어느 집에서는 매일 가족들이 어떤 색상의 옷을 입을지 정해 놓고, 요일마다 넣는 잡곡을 미리 선택해서 냉장고에 붙여놓는다고 한다.

유난스러운 듯 또는 별 것 아닌 듯 하지만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작은 에너지라도 아끼게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들이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이유는 일상에서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는 에너지를 아끼는 대신 정말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고자 하는 것이다.

콩알만 한 에너지라도 모아서.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에 아낀 에너지를 쓰는 것.

애먼 데 에너지를 쏟다가 정작 써야 할 곳에서 못 쓰고 주저앉지 않는 것.

무엇을 살까, 수많은 물건을 인터넷 바다에서 멍하니 둘러보는 일, 목적 없이 대형 복합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 이번 달에는 또 얼마를 갚아야 하나,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


우리는 쓸데없는 시간에 에너지를 흘려보내느라 정작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보낼 때가 많다.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유가 마침내 생겼는데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피곤해’라고 말한다든지,

엄마와의 시간을 일주일 동안 애 닳게 기다린 아이에게 ’이따가‘라고 말한다든지,

재미도 없는 숏폼을 멍청하게 이어 보느라 구석에 쌓인 책들을 외면한다든지,


이러면서, 이럴 거면서

종종

나는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오늘은 유난히 피곤하다고 말한다.


나는 마음을 새로이 다잡는다. (지키기 매우 어려우므로 매일 새롭게.)


물건의 쓰임이 하찮을 땐 사지 않는다.

작은 불편은 감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살까 말까 고민이 될 땐 사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즉시 정리한다.

버릴 것들은 미련 없이 버린다.

내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주인을 찾아준다.

…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이 들 땐 책장을 편다, 노트북을 연다, 허리를 숙여 아이와 눈을 맞춘다, 신발을 신는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한다. 저스트 두 잇.


일상에서 잡다한 것에 힘을 쓰지 않고 아낀 에너지를 가족에게 와르르 쏟아붓고 싶다.

그리고 나의 훌륭한 선생인 수많은 책들을 읽고 글 쓰는 일에 시간을 더 보내고 싶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귀한 게 있다는데 그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볼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세상.

자세히 보면 이것도 가짜, 저것도 가짜인 세상.

진짜란 무엇인가를 가만가만 고민하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사진 출처: 언스플래쉬 무료 이미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예쁜 옷보다 좋은 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