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틈에 길섶에 강아지풀이 지천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잡풀과 섞여 노방에 숱하게 엉키어 있는 풀이라 그런지 막 꺾어도 죄책감이 덜하다.
어릴 땐 강아지풀의 줄기를 잡고 쑥 뽑아 친구들 볼에 대어 흔들며 간지럼을 태웠다. 친구가 까르르 웃으면 나도 같이 웃고 싶어서 내 볼에, 뒷덜미에 비벼대곤 마구 웃었다.
강아지풀의 꽃말은 동심이다. 사람들의 뭇발길에 밟힐수록 잘 자라는 잡풀이고, 직관적인 모양새라 그런지 ‘작명가’가 꽃말을 짓는 데 그다지 애를 쓴 것 같지 않다.
꽃이삭의 모양이 통통한 강아지 꼬리를 닮았다.
이 풀의 또 다른 꽃말은 노여움이다. 요 귀여운 강아지 꼬리에 무슨 대단한 노여움씩이나 깃들었을까 싶어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강아지풀은 벼목으로, 종자를 구황식물로 이용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요즘 우리가 먹는 조는 강아지풀을 작물화한 곡식이다.
sf 애니메이션인 <닥터스톤>에 강아지풀 라면이 나온다. 강아지풀은 문명이 사라진 먼 미래에 인류의 식량으로 등장한다.
이 만화의 열혈 팬이 이 상상 속의 음식을 실제로 만들어서 블로그에 올린 걸 보았다.
강아지풀을 채취해 대를 분리해내고, 블렌더로 갈아 털을 떨어낸 뒤에 씨앗만 걸러서 달걀을 넣고 반죽을 치대어 면을 만들었다. 만든 이가 실제로 먹어 보고 맛평도 남겼다. 면에 찰기가 없어 뚝뚝 끊어지고, 쑥맛과 비슷한 맛이 난다고 했다. 얼핏 보기에 부추칼국수와 비슷하다.
낭만적으로 친환경 캠페인을 벌였던 지구온난화(warming) 시대가 막을 내리고, 급진적인 환경 운동에 당장 돌입해도 이미 늦었다는 회의적 시각이 팽배한, 지구열대화(boiling) 시대에 진입했다. 어쩌면 강아지풀이 미래 식량으로서 귀한 대접을 받을 때가 올지 모르니 2차원적인 이 만화 레시피도 어딘가에 기록해 두기로 한다.
얼마 전에 엄마에게 강아지풀의 새로운 쓸모에 대해 들었다.
엄마와 성지 순례를 함께 한 일행 중에 한 명이 강아지풀을 보더니 치실로 쓰기에 좋다는 말을 하더란다.
강아지풀을 치실로 어떻게 써? 이빨에 끼지 않나?
“아니야. 전혀. 맞춤이야, 맞춤.”
일행에 의하면 인적이 드문 들판에서 자라난 강아지풀을 채취해서 ‘강아지 꼬리’는 잘라내고, 대만 깨끗한 물에 씻어 통풍이 잘 되는 곳에서 며칠 말린단다.
그렇게 잘 건조된 대를 알맞은 길이로 잘라서 작은 통에 가지고 다니며 치실로 쓴다고 했다.
나는 강아지풀을 치실로 쓰는 이의 하루를 생각한다. 지천에 아무렇게나 자라난 강아지풀을 치실로 쓰는 이의 생활은 어떠할까.
아마도 걸음마다 숨결마다 땅과 물과 공기에 독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 의식적으로 살피는 하루를 살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사이클에 맞춘 무의식적인 소비를 멈췄을 것이고, 배달 음식은 먹지 않을 것이고, 제철 과일과 우리 농산물을 즐겨 먹을 것이며, 일회성으로 쓰고 버리는 썩지 않는 물건은 쓰지 않을 것이고, 몸을 닦거나 그릇을 닦거나 고체비누를 사용할 것이고, 음식쓰레기는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이는 먹고 소비하는 것마다 배출되는 탄소의 양을 어림하고 있을지 모른다.
덩어리로 보나 무게로 보나 존재감이 미미한 치실‘조차’ 본인이 직접 가공한 풀로 사용하는 이이니, 친환경적인 시각으로만 보자면 그의 애쓰는 하루가 훤히 보인다.
나는 그이가 마른 강아지풀의 대를 치아 사이에 넣고 우물우물하는 모습을 그리며, 무임승차를 떠올렸다.
치실도 자연에 돌려주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이가 가까스로 빠듯하게 운행하는 버스에 나는 무임으로 승차한 승객에 다름 아니다.
내가 텀블러를 쓰고, 장바구니를 가지고 다닌다 한들 강아지풀을 치실로 쓰는 이의 공에 발끝에라도 닿을 수 있겠는가.
‘아이고, 그렇게까지 해야 돼? 치실이 뭐 얼마나 쓰레기가 된다고. ’ 마음의 소리가 불쑥 올라온다.
그러나 나는 곧, 툰베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던진 말과 비장한 표정을 떠올린다.
“How dare you?” (어떻게 감히 그래요?)
지구가 여러 개라도 되는 것처럼 살아가는 나와 사람들에게 외치는 말이다.
이제 아무리 환경을 위한 노력을 한들 소용없다는 말이 나온다. 회복 타이밍을 놓쳤다고 말한다.
하지만 개별적이고 작은 힘은 결코 개별적이지 않으며 작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강아지풀 치실을 쓰는 사람이 있기에 지구는 유기체로서 자정 하려고 애를 쓰고 있고, 그 안에 사는 우리는 반성하며, 요란할지라도 결국엔 앞으로 나아간다.
강아지풀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쓸모를 전해준 얼굴 모를 그 사람에게 계속 그렇게 연구하며 애를 쓰고 생활해 주기를 바란다.
그이 혼자가 아니다. 외로운 캠페인이 아니다. 그의 생활을 건너 건너 들은 나의 마음이 무척이나 고무되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강아지풀을 치실로 쓰는 이가 있다고 전해주었고, 그이는 누군가에게 또 전할 것이라 믿는다.
강아지풀 치실의 쓰임과 의미는 이렇게 넓고 크다.
나는 이제부터 요금을 내는 승객이 되겠노라며 다시 마음먹는다.